대중성을 노린 상업적인 이야기들은 기승전결에 있어 어느 정도 그 틀이 정해져 있다.
슬픈 결말이라면, 처음에는 무조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안 그러면 뒤에 다가 올 슬픔이 극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말은 앞의 행복했던 추억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정도가 무난하다.
감동적인 결말이라면, 처음에는 극복하기 힘든 상황들을 나열해줘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인류애적인 도움으로 차가운 현실을 극복해 나간다. 주인공은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인물로 성장해야 한다.
재미있는 결말이라면, 주인공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관객이 위기의 상황에 처한 주인공을 믿고 다음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범죄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만약 작품이 실제 범죄 사건을 모티브 혹은 차용하고 있다면?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시작과 다른 혹평을 받으며 막을 내렸다. 그중 15회에서 등장하는 '911 테러' 장면은 주인공들의 대사와 서사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기자인 남자 주인공은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여자 주인공과 멀어지게 된다. 한창 좋을 시기에 멀어지게 됐으니 두 사람의 애틋함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취재를 위해 뉴욕 특파원으로 나간 애인을 그리워하는 것과, 실제로 벌어진 911 테러 사건을 주인공들의 애정 확인용으로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오늘은 목소리만 나오나 보네.”
“오늘은 얼굴 안 나와서 실망할 거 같아서. 너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스탠드업 찍을 때마다 옷 신경 쓰는 거 알아?”
대사는 달콤하나, 연기가 자욱한 쌍둥이 빌딩을 앞에 둔 기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는 적절하지 않다. 백번 양보해서 실제로 기자가 같은 상황에서 애인에게 저런 말을 했었어도, 그걸 미디어에서 다루지는 말았어야 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미디어와 창작자를 향한 비슷한 논란들은 계속되어왔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마지막 회에서 당사자의 동의 없이 쓰인 자동차 사고 장면이, 드라마 <모범택시>에서는 비슷한 범죄를 겪은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문제가 되어 뭇매를 맞았다.
왜 계속해서 이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건 제작자들이 자신이 만들고 있는 것이 '미디어' 작품이란 사실을 망각해서다. 흥행의 요소에 집착하는 바람에 미디어가 가진 영향력과 전파성을 잊어버린 것이다.
소련이 예술을 정치화시켜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부르주아 혐오를 심어준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디어에게 그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생물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존재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생명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은 동물도 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 이야기에 몰입하여 울고 웃고 기뻐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때로는 영향력 있는 작품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언론과 정치가 종이에서 벗어나 브라운관으로 옮겨진 이유는 실제와 같은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더 높은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디어는 왜 하필이면 '가해자'의 시각을 선택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자극적인 이미지가 기억에 남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 사건을 이용하면 관객의 흥미와 몰입 또한 쉽게 끌 수 있다.
몇몇 연출자들은 현실의 범죄를 실제처럼 보여주는 것이 '실력'이라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혹은 역사적으로 거대한 사건들을 주인공의 서사를 강화시켜주는 '도구'로만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중에게 각인되기 위해 소수의 피해자들을 괴롭게 만드는 이야기는 연출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의 문제다.
“성경을 보기 위해 촛불을 훔쳐서는 안 된다.”
서양의 이 유명한 속담은 드라마 <소년심판>에서도 등장한다.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잘못된 수단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소년심판>에서 주인공 심은석 판사는 항상 피해자의 사진을 앞에 두고 재판을 진행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문득 가해자에게 이입하여 피해자를 상처 입히는 판결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미디어에게도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 창작자로서 이런 의견이 '창작의 자유'를 검열하고 해칠 수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는 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남을 해쳐서까지 누리려는 자유는 민폐이며 폭력이다.
이야기는 창작자의 '흥미'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개인의 유흥이 절대로 사람의 삶보다 먼저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