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에게 바라는 것은 솔직함이 아니라 책임감이다

by 공익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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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직한 후보>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듯 들은 말이 인생에 진리로 남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릴 때 영화 잡지에서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오랜 시간 해리로서 살아온 그가 죽음의 성물을 마지막으로 해리를 보내게 될 때의 심경을 담은 인터뷰였다.

그런데 그곳에 서론으로 쓰인 문장 하나가 내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 버렸다.


“누가 진짜 친구인지 알고 싶다면 가장 바닥인 상태일 때 주위를 둘러보면 되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의 모습을 살펴보면 된다.”


이 문장 하나에 매료되어 버리는 바람에 정작 해리가 그 인터뷰에서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떴는데도 여전히 연기에 대한 열정과 배역을 가리지 않는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는 배우’라는 내용이었던 거 같다.


어찌 됐든 이후 내 삶의 지표가 되어준 저 문장 하나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저 인터뷰는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덕분에 성공한 후에 태도가 변한 사람들을 보며 실망할 일도 적어졌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다고 생각하게 됐으니까. 잘 나가서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동안 잘 숨겨왔던 거다.


영화 <정직한 후보>의 주인공 ‘정치인 주상숙’은 악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악인의 캐릭터다. 드라마를 통해서도 익숙하지만, 정치 뉴스를 통해서도 익숙하다. 기업에게 청탁을 받고 사업을 밀어주고, 서민인 척 하지만 사실은 서민의 삶이 어떤지 모르며, 아들의 군면제를 위해 발 뻗고 나선다.

지금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실존 인물 몇 명이 떠오르고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지만 굳이 여기에 끄집어내어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할머니의 소원으로 갑자기 거짓말을 하지 못 하게 된 주상숙은 자신에게 흠이 되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말부터, 옳은 일을 위해서는 했어야 하나 지지층 때문에 하지 않고 있었던 말들까지 전부 내뱉게 된다.


솔직함. 이 영화는 정치인의 솔직함이 가식보다 낫다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마음에도 없는 ‘서민의 일꾼이 되겠습니다.’라는 말 대신 ‘샤넬백 내팽겨 치면서 페라리 핸들에 기대어 울면 폼 나잖아요. 제가 부자동네 살게 해 주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정치인이 낫다는 거다.


<정직한 후보>는 코로나 시기에 개봉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누적관객수 150만 명을 찍으며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관객들은 실제로도 이런 정치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주인공 주상숙은 절대로 좋은 정치인이 아니다. 친모가 아님에도 제 자식처럼 아들을 키워왔고, 한 때는 보험회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은 힘없는 사람들을 도왔던 적도 있으나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기업과, 지역과, 개인에게 피해를 끼친 정치인임에도 영화에서조차 그녀는 1년이 조금 넘는 형을 살다 왔을 뿐이다. 기부했다고 하지만, 감옥살이 수필로 돈도 벌고 정치인으로 다시 재기하여 서울시장 후보에도 나온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주상숙 같은 정치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감상을 남겼다. 이건 국민들의 마음이 호수처럼 넓어서가 아니라, 현재 정치인들에게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이 ‘책임감’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정치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행위에 대해 안타깝게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개인적으로 책임이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뒤처리를 남에게 미루고 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건의 마무리를 짓는 행위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정치인을 본 기억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인정이라도 하면 다행일까.


정치 뉴스는 매일매일이 시끄럽고 피곤한다. 누구는 폭로하고, 누구는 아니라 하고, 누구는 음모라 하고, 누구는 진실이라고 한다. 똑같은 사람을 두고 어떤 단체에서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 외치는데 또 어떤 단체에서는 악마 같은 놈이라 손가락질한다.


중요한 것은 결국 정치인들이 직접 밝히는 진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기자, 주변 지인, 반대 진영에서 고발하고 당사자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다가 더 이상 도망칠 구멍이 없을 때나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수순이다.

그 과정에는 책임도 자신의 입으로 밝히는 솔직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의 시장조사기업인 입소스(Ipsos)가 23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 제일 신뢰할 수 없는 직업 1위가 정치인으로 나타났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23개국 중 22개국이 모두 제일 신뢰할 수 없는 직업 1위로 정치인을 뽑았다. 딱히 우리나라만 유난은 아니란 거다.


자리가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드는 거라면, 정치인이라는 자리에 앉고자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리도 전 세계적으로 신뢰도가 낮은 건지 생각하게 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한 인물의 자식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중이다. 진행되는 흐름을 보자면 ‘내로남불’이라는 단어만 떠오를 따름이다. 과거 비슷한 사태에 대해 ‘도대체 본인들은 얼마만큼 깔끔하게 숨길 자신이 있길래 저럴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주상숙처럼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실제로 자신의 과거와 행동이 깔끔해서 저렇게 행동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어찌 됐든 이번에는 ‘책임’ 지는 결말만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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