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야구'는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by 공익허브
1500x500.jpg

※영화 『야구소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로 야구가 시작됐다.


사실 시작한 지는 좀 됐다. 다만, 내가 응원하는 팀이 승리를 간헐적으로 하는 바람에 심리적으로 아직 개막한 느낌이 안 들뿐. 참고로 어제도 졌다. 친구 말로는 내가 1년 동안 할 욕을 프로야구 시즌에 다 한다고 한다. 야구는 점잖은 사람을 거칠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연고지도 아닌 야구 구단을 어쩌다 응원하게 됐을까. 억지로 멱살 잡혀 끌려간 첫 직관이 승리로 끝났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먹었던 치킨과 시원한 맥주가 입에 착 달라붙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인생의 전환점이 대부분 우연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그렇게 야구도 내 인생에 입주 신고를 넣었다.


문제는 이 세입자가 가끔, 아니 꽤 자주 이해 못 할 행동을 한다는 거다. 그럴 때마다 간절히 쫓아내고 싶어 지지만 이미 영구 임대로 계약을 해버려서 맘대로 쫓아 내지도 못 한다. 어쩔 수 없지. 돌이킬 수 없다면 뛰어드는 수밖에. 영화 『머니볼』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게 야구냐, 농구냐 싶을 정도로 점수차가 나다가도 홈런 한 방 때려 주면 갑자기 가슴에 희망과 희열이 가득 차오른다. 그렇다. 이 적폐 스포츠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야구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 중 누군가는 야구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 야구는 특정인에게만 ‘허락’된 스포츠다. 정확히는 특정'성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야구는 4대 구기종목(야구, 축구, 배구, 농구) 중 유일하게 여성 리그가 존재하지 않는 종목이다.


10_49_20__5ec72fa0a7812[W578-].jpg


야구가 여성에게 ‘허락’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1981년,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 당시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했다.


이 조항이 사라진 건 1996년이 되어서였다. 그때부터 여성도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있게 됐으나,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여성 리그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국제대회 시즌이 되면 남자 선수들은 잘 갖춰진 환경에서 훈련과 경기를 반복하다가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하지만 여자 선수들은 상비군으로 있다가 훈련 시기에 맞춰 모인 후,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영화 『야구소녀』에서는 야구를 너무 사랑해서 직접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고등학생 ‘주수인’이 등장한다. 주수인의 야구 사랑은 뛰어난 실력과 승리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리틀 야구단 때부터 투수로서 눈에 튀는 실력을 가진 그녀는, 국내 고교 야구팀의 유일한 여자 선수가 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주수인이 프로가 되지 못할 거라고 애초부터 단정 짓는다. 학교뿐만 아니라 프로 야구 관계자도 매한가지다. 주수인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입단 테스트에 존재하지 않던 서류 심사를 넣어 떨어트리기도 하고, 코치에게 주수인의 종목을 핸드볼로 전향시키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야구에는 여자 리그가 없기 때문에 주수인이 프로선수가 되려면 남자 선수들과 같이 경기를 해야 한다. 주수인의 최고 구속은 놀랍게도 134㎞나 된다. 하지만 남자 투수에게 134㎞는 놀라울 만큼의 구속이 아니다. 그 사실을 주수인 본인조차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프로를 목표로 하는 그녀에게 ‘134㎞를 던진다’는 말은 칭찬이 되지 못한다.


88f4cdce8cf9a0746d82be76c6e4cdf965207951.jpg


그런데도 주수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기에는 야구를 너무 사랑하고, 야구를 너무나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열정이 새로 부임한 코치, 최진태의 마음을 울린다.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분명 좋은 투수다. 그러나 투수에게 중요한 건 공을 빨리 던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타자가 공을 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진짜 좋은 투수의 본질이다.


최진태의 조력으로 주수인은 구단 입단 테스트 기회를 가진다. 그곳에서 자신의 장점을 살린 너클볼과 직구를 이용하여 프로 선수를 3진으로 아웃시킨다. 그리고 주수인은 바라고 바랬던 프로야구 2군 투수가 된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고되고 거칠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 있을 거란 것도 알고 있다. 주수인을 보고 동경하여, 그녀를 따라 고교 야구팀에 입부 지원서를 낸 여학생이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세상이 점차 나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 하나, 여전히 야구처럼 성역할이 딱딱한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있는 직업들은 존재한다. 물론 이건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 전 세계에서 프로 여성 야구 리그가 있는 팀은 일본이 유일하다.

하지만 일본 프로 여성 야구도 홈구장을 가지고 경기를 진행하지는 못 하고 있다. 그들은 매 경기 때마다 지역을 순회하며 경기를 치르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여성 야구가 가장 잘 발달되어 있는 나라다. 일본은 여자 고교팀과 대학팀이 각각 30개씩 존재하고 있으며, 직장인으로 구성된 클럽팀이나 기업의 후원을 받는 반실업 클럽팀까지 수 십 개 팀이 활동 중이다. 적어도 야구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열려 있는 것이다.


열정은 성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기회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다. 기회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펴졌던 열정의 불씨는 금방 꺼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오르는 열정이 있다. 바로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다.


올해 초, 호주 프리미어 리그에는 첫 여성 투수 프로선수가 출전했다. 야구가 발달되어 있는 미국 메이저 리그나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제네비브 비컴. 제네비브는 호주에서 연속 두 시즌을 우승한 멜버른 에이스와 계약 후, 첫 번째 경기에서 1이닝 동안 무실점과 안타를 허용하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제네비브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는 여성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소프트볼을 강요하거나, 소프트볼을 해야만 한다고 하면 절대 듣지 마라.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당신이 충분히 열심히 한다면 당신은 어딘가에서 성공할 수 있다. 보다시피 내가 한 것처럼 당신도 할 수 있다.”


프로 여자 야구 리그가 없음에도 현재 한국에는 전국에 총 48팀, 942명의 여성 야구 선수가 존재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은 항상 현실을 뛰어넘기 마련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국형 좀비물에서만 보이는 특징 : 임대아파트 차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