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건이든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것이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이라도 기억에서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지만, 미해결 사건의 피해자들에게까지 그 선물은 닿지 않는 듯하다.
어차피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 거라면 그 끝을 나쁘지 않게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이다.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에게는 기억의 매듭을 원하는 방향으로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타인의 손에 자신의 모든 시간과 경험을 내맡겨 원하는 결과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기도에 부응받는 사람은 사회의 낮은 계층으로 갈수록 희박해진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한국의 다큐멘터리가 전 세계 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에서는 공개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10위권 안에 들고 있으며, 전 세계 순위에서도 18위라는 높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사이버 지옥 : n번방을 무너뜨려라>.
2년 전,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았던 n번방 사건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다큐멘터리는 피해자들이 어떤 ‘학대’를 당했으며, 가해자들은 어떤 수법을 취했고, 해당 범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개입되어 있었는지 밝혀낸다. 그 과정에서 사건을 보도했던 기자와 PD와 작가와 경찰들이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 가해자들이 얼마나 법을 무시하고 잡히지 않을 거라 단언하며 범행을 벌여왔는지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속속들이 털어낸다.
<사이버 지옥 : n번방을 무너뜨려라>는 재연된 연출과 디지털 그래픽을 통해 대중들의 흔한 인식 안의 ‘다큐멘터리’스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있다. 다큐멘터리를 평소에 보지 않는 사람도 몰입도 있게 작품에 집중하여 사건과 가해자들의 치밀하고 비인간적인 면모에 자연스레 집중하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 번째는 26만 명(중복가입자 포함)의 인간들이 오랜 시간 피해자가 천 여명이 발생하는 동안 그 누구 하나 신고하지 않을 수 있었던 근거, 디지털 범죄에 대한 미비한 대책이다.
n번방에서 발견된 피해자 천여 명 중 미성년자의 퍼센트는 60% 이상이었다고 한다. n번방 안에서 어린아이들에게 잔혹한 학대행위를 하며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절대로 잡힐 일이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조주빈 일당을 제외하고 n번방 ‘일반 가담자’로 재판을 받은 사람 수는 378명. 꽤 많아 보이지만 26만 명 중 378명은 퍼센트로 따지면 0.15%밖에 되지 않는다. 378명이란 숫자는 너무 ‘나댔거나’ ‘운이 없어서’ 잡힌 수 정도로 보인다.
이들이 사용자의 기록을 남기지 않는 텔레그램을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검거된 인원 자체가 이리도 터무니없으니 당연히 ‘잡히지 않을 거라’ 확신하며 범죄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사기획 창’에 출연한 n번방의 한 피해자는 자신의 신상과 사진이 가해자들에 의해 공유되어 SNS상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범죄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방문했다가 처음부터 이러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SNS 하나만 놓고서는 거의 잡기 힘들다. 잡기도 힘들고 잡으려면 시간도 되게 오래 걸린다.”
이 말을 들은 피해자는 비슷한 사건들이 많이 접수되다 보니, 경찰 입장에서는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가 그냥 덮고 가길 원한다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피해자를 도와주는 기관에서 애초부터 피해자를 돕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디지털 범죄 사건에 대해 한국 경찰의 태도가 냉소적이란 것은 최근 발생한 ‘메타버스 그루밍 성범죄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30대 남성이 11세밖에 되지 않은 학생과 가상의 공간에서 ‘연애’를 하며 사진 요구, 개인정보 수집, 가스 라이팅을 한 사건이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피해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현행법으로 적용하기엔 모호하다”는 대답이었다.
다행히 피해자는 어머니와 함께 캐나다에서 따로 거주 중이었다. 캐나다의 경찰은 한국과 달리 신고 당일 한국말이 가능한 직원과 함께 바로 집으로 출동하였다. 그리고 포렌식을 위해 휴대전화를 회수했고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를 인계하지 말아 달라’ 안내까지 했다. 가해자가 미국에 체류 중인 걸 확인한 캐나다 경찰은 현재 미국과의 공조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신고 단계에서부터 피해자가 맛봐야 하는 무력함은 가해자들의 힘을 키워주는 연료가 될 뿐이다.
두 번째 시사점은 솜방망이 처벌들이 범죄자를 키워냈다는 것이다.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웰컴 투 비디오 등. 다큐멘터리는 n번방 같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골든타임은 계속해서 존재해 왔었다고 말한다. 그동안 한국은 이 골든타임을 어떻게 보냈길래 n번방 사태까지 올 수 있었던 걸까.
먼저 소라넷은 1999년 개설되어 폐쇄되기까지 18년이 걸렸다. 그리고 소라넷 회원 100만 명 중 처벌받은 사람은 운영자와 징역 4년에 추징금 0원을 선고받은 공동 운영자 단 2명뿐이었다.
웹하드 카르텔 양진호에 대한 재판은 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양진호는 웹하드 카르텔이 아니라 폭행, 마약 등의 개인 범죄로 검거되었다. 현재 웹하드 사이트에 불법 촬영물 등을 올린 ‘헤비업로더’나 자료를 다운 받아 본 ‘회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웰컴 투 비디오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운영자인 손정우는 성 착취물 배포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 6개월 만을 선고받았다. 손정우가 어리고, 범죄전력이 없고, 범행을 시인하며 반성하고 있으며 부양할 가족이 생겼다는 이유였다. 그는 20만 개가 넘는 동영상이 유통된 플랫폼을 운영한 혐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법원은 미국이 요청한 손정우의 송환까지도 불허했다.
이러한 법원의 처벌은 그들이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고 “벌금 300만 원만 내면 된다”라는 발언을 웃으며 하게 만드는 바탕이 됐다.
많은 매체들이 ‘n번방은 법이 키운 범죄자 집단’이란 평가를 한다. 지금까지도 n번방에 참여했던 사람 대다수가 처벌받지 않고 있다. 게다가 처벌받은 ‘일반 가담자’들 중 74%가 징역형의 집행유예였고, 22%는 벌금형을 받았다. 실형 선고를 받은 이는 단 6명뿐. 그것도 평균 13.2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불법 촬영물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누군가에게 팔리거나, 공유되고 있다. 그렇기에 n번방 사건은 계속해서 ‘현재 진행형’인 사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