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제 이야기]-이론편 (2)

by 공익허브


1. 왕정에서 민주주의로의 변화, 그리고 배심제


인류의 역사는 왕족을 비롯한 소수의 권력자가 지배하는 구조에서 대다수의 시민에게 주권이 넘어오는 과정이었다고 표현해도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수백 년 전만 해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왕정 형태의 독재 체제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많은 나라들이 선거를 포함한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하고 있죠. 한국 또한 일본에게서 독립하던 1948년 8월 15일에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발표하며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상호견제를 위해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세 가지 영역으로 권력을 분산하여 권력의 독점을 예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에서는 어떠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 법원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을 통해 최종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당사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이나 위계의 차이와 무관하게 법률적 전문성을 지닌 판사가 독립적이고 공정하게 내리는 결정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제도 또한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판사 개인, 혹은 소수의 판사들에 의해 내려지는 결정은 개인의 신념이나 태도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있으며, 일반 시민들의 상식 및 정서와 동떨어진 결정이 나타나는 경우도 다수 존재하니까요. 이에, 미국과 영국 등의 국가에서는 배심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배심제의 기본적인 의의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 모든 결정이 좌우되는 것을 방지하고 시민들이 재판 과정에 직접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죠. 이는 소수의 엘리트 법조인들이 절대적인 지위를 갖는 사법 권력을 일반 시민들이 나누어 갖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2. 배심제의 기능은 무엇일까?


전적으로 법관들에 의해 주도되던 기존 한국의 사법체계와 구분되는 배심제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적인 법적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 시민들이 재판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권, 국가에 따라서 세부적인 제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전문 법관이 아닌 시민이 재판에 직접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은 배심제라고 불리우는 모든 시스템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특히 영미법계에서는 배심제도가 중요한 사법운영 체제로 사용되어 왔지요.


1) 사법권력의 분할


이러한 배심제의 가장 근본이 되는 기능은 법관들에 의해 독점되어온 사법권력을 국민들이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법권력은 전문교육을 받은 소위 ‘엘리트’ 법관들에 위해 독점되곤 합니다. 하지만 배심제는 오로지 사법부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재판의 결과에 일반 시민들이 일반 시민의 관점에서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측면에서 사법권력에 대한 중요한 견제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배심원의 평결을 판사가 자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이러한 기능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 있죠.


2) 시민 교육의 수단


배심제는 민주주의 사회의 국민들에게도 단순한 재판 참여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배심제가 시민교육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배심제도의 도입을 통해 시민들이 제도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더 나아가 책임감 있는 민주시민이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말해 배심재판에 참여한 시민들은 단순한 법률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민주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배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배심재판에 참여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연구결과들도 거의 대체로 배심원 참여 경험이 이후 시민참여 활동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배심제가 깊게 뿌리내린 미국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배심원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후에 정치적인 유효감을 더 강하게 느꼈을 뿐 아니라 투표를 비롯하여 다양한 시민참여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3) 사법결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향상


배심제는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향상에도 기여합니다. 법을 해석하고 그 법에 근거해서 어떤 사건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분명 상당한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관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지요. 하지만 특정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로만 한 집단이 형성되다 보니 법원의 구성은 국민 전반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국민 전반의 정서를 파악하지 못하고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판결이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나오게 되고요. 국민들이 직접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제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를 재판에 반영하여 사법결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향상하는 기능 또한 수행합니다.


3. 헌법에서 배심제를 천명한 나라


지구상에서 배심제가 가장 뿌리깊게 자리잡고 유의미한 영향력을 끼쳐온 나라는 아마 미국일 것입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배심제의 기능들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 나라 또한 미국이지요. 미국의 배심제도가 다른 국가의 배심제도와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나던 시점부터 배심제도를 사법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규정하고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1789년 제정된 미연방헌법에서는 탄핵사건을 제외한 모든 형사재판이 배심제로 진행되어야 할 것을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지속적으로 추가된 수정헌법들을 통해 형사재판의 기소 뿐 아니라 민사재판에도 배심제도가 적용될 수 있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수정헌법 5조에서 기소와 관련된 내용을, 수정헌법 7조에서 배심재판의 민사에의 적용을 언급하고 있죠. 이렇듯, 미국은 국가의 가장 중심적인 법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에서부터 배심제도를 규정한 나라이기에 배심제의 제도적 기반이 단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의 근본까지 배심제가 뿌리내린 미국의 배심제는 어떤 형태로 운영되고 있을까요?


4 . 미국의 배심제 뜯어보기


1. 민사


미국의 수정헌법 7조는 “보통법상의 소송에 있어서, 계쟁의 액수가 20달러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배심에 의하여 심리를 받을 권리가 보유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배심에 의하여 심리된 사실은 보통법의 규정에 의하는 이외에 합중국의 어느 법원에서도 재심을 받지 아니한다”는 구절도 존재하죠. 즉, 20달러 이상이 걸린 민사소송이라면 누구든 배심원들을 통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수정헌법은 연방의 사건에만 적용되며, 민사재판에는 복잡한 법리가 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에 배심원의 전문성의 부재가 문제시될 가능성이 있어서 실질적인 적용범위에 있어서는 각 주별로 차이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사재판에도 배심제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형사재판 뿐 아니라 사법체계 전반에 배심제를 적용하여 사법권력의 주권 또한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민사재판이라고 해서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왜곡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실제 사용률이 높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의로운 재판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형사


미형사재판에서의 배심제는 크게 대배심과 소배심으로 나누어집니다.



1) 대배심 (기소배심)이란?


만약 법치주의 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맞습니다. 그 사람을 법정에 보내야 하겠죠. 이렇듯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하여 법원에 심판을 구하는 행위를 기소라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기소를 할 수 있게 된다면 법적으로 적합하지 않거나 허위사실에 기반한 기소 등 기소 남발에 의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겠죠? 그래서 한국의 법은 오직 검사들에게만 기소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기소여부에 국민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죠.


반면, 미국에는 중범죄에 대해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기소하는 것이 적절한지 판단하는 기소배심제도, 즉 대배심제도가 존재합니다. 검사가 기소를 하기 위해서는 그 타당성을 배심원들에게 먼저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죠. 미국의 연방형사소송규칙에 따르면 기소배심원단은 16~23인으로 구성되고, 기소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제시해 그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12인 이상의 찬성이 나오면 기소가 결정된다고 하네요. 이렇듯, 기소 과정에 배심제도를 도입하는 것에는 국민의 승인 없이 함부로 기소하는 것을 견제한다는 취지가 깔려 있습니다. 기소단계에서부터 검사의 특권남용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죠.


2) 소배심 (재판배심) 이란?


재판배심, 즉 소배심제도는 우리에게 더 친숙한, 영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실제 재판에서의 배심을 의미합니다. 앞서 살펴본 대배심제도와 비교해 배심원의 수가 적어 소배심이라고 불리우는데요. 구체적으로는 범죄의 유형을 확정하고 죄에 대한 평결을 내리는 과정을 말하죠. 배심제를 떠올릴 때 우리가 가장 흔히 떠올리는, 피고인을 처벌해야 하는지, 처벌해야 한다면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배심원들의 모습은 대부분 소배심에 참여하는 배심원들의 모습입니다. 한편, 수정헌법 제6조에서 모든 형사소추에서 피고인이 배심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형사재판에서 배심재판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피고인이 원할 경우 배심재판받을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연방대법원의 헌법 해석이었다고 하네요.


소배심에 참여하는 배심원들은 계층과 성별, 인정에 관계없이 영어 이해능력이 있는 미국시민권자로 선정됩니다. 전통적으로 총 12명이 선정되어 왔으며, 배심제의 원칙은 이렇게 선별된 12명의 배심원 전원이 유죄 또는 무죄에 합의해야 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재판을 다시 진행하게 된다고 하네요. 하지만 1970년의 판례에서 배심원이 12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배심재판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으며, 사형에 관한 판결이 아니면 주(州)법에서 6인의 배심원단을 구성하는 것도 적법하다는 판결 또한 존재합니다. 따라서, 현재에는 배심원단의 인원수에 있어서는 미국 내 주별로 차이가 있다고 하네요.



5. 한국에도 배심제가 (있긴) 있다


한국에 배심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2008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현재 한국에서는 초기 도입 당시의 형태와 유사하게 일부 형사재판에 한하여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만 국민참여재판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과 달리 피고인이 원하는 경우에도 재판부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배심재판을 배제할 수도 있죠.


배심원 선별 대상에는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 중 대통령이나 법관 등 직업적인 이유로 제외되는 사람, 불공평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는 사람, 고령이거나 장애가 있는 등 부득이한 이유로 직무 수행이 어려운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이 포함됩니다. 배심원의 인원수는 사형 ·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해당하는 사건일 경우에는 9명, 이외의 사건에 대해서는 7명이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렇게 선정된 배심원들은 해당 사건에 대해 관련된 사실, 법의 적용 및 형의 결정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재판에서 변론이 종료된 후 배심원들에게는 재판장이 다양한 유의사항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하며, 그 후 배심원들이 의견일치를 보고 그에 따라 평결을 내리게 됩니다. 배심원들 중 과반수가 원한다면 심리에 관여한 판사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하며, 배심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을 경우에는 판사의 의견을 참고하여 다수결로 평결을 내린다고 하네요.



6. 국민참여재판은 뭐가 다르지?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은 그 형태에 있어서는 미국의 배심제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무작위로 배심원들을 선정하고 배심원들이 논의를 통해 평결을 내린다는 점 등은 미국의 배심제와 한국의 국민참여재판 사이의 유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국민참여재판과 미국의 배심제 사이에는 두 제도 사이에 유의미한 효력의 차이를 낳는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들이 존재합니다.


첫째,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에서는 배심원들이 내린 평결에 재판장이 기속되지 않습니다. 즉, 배심원들이 어떤 평결을 내리는지와 무관하게 법관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법관이 배심원단의 평결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려야만 하지요. 물론 한국에서도 배심원단과 다른 판결을 내릴 경우 법관들은 피고인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줘야만 합니다. 하지만 선출되지 않은 법관들의 사법권력을 국민들과 나눈다는 배심제의 취지를 고려해보았을 때 이것은 배심제의 효력을 제한하는 큰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앞서 지적한대로 한국에서는 법원이 자의적인 의지로 배심재판을 배제할 권한을 갖습니다. 즉, 국민참여재판의 대상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 피고인이 원한다고 해도 법원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국민참여재판 대신 통상적인 재판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이죠. 미국에서는 피고인이 원하지 않을 경우 배심재판을 포기할 권리가 있을 뿐, 법원에서 독단적으로 배심재판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동료 시민들에게 재판받을 권리를 헌법에 명시한 미국의 정신, 그리고 사법권력을 국민이 나눠 갖는다는 배심제도의 기본 개념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셋째,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에는 기소배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은 검찰공화국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검찰이 유례없이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고 있는데요, 이는 검찰이란 조직이 양 손에 기소권과 수사권이라는 두 가지 강력한 무기를 들고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검찰의 과도한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고, 그 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권자인 국민들이 직접 기소권을 통제하는 기소배심은 아직까지 도입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7 마치며


배심제는 단순히 국민이 재판에 참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배심제는 재판 현장에서 국민들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실현 방식이며,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국민주권주의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성숙한 민주사회를 이루기 위한 시민교육의 현장이 되기도 하지요. 국민정서에 어긋난 판결들과 사법농단을 비롯한 다양한 권력남용으로 국민의 신뢰를 점점 잃어가는 한국의 사법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배심제의 확대가 분명 필요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증진하기 위해 도입된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은 널리 사용되지도 않았으며, 그 효력도 권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죠. 하지만 배심제의 낮은 사용율은 배심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배심제가 충분히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습니다. 배심제가 확대되어 그 적용범위와 효력이 강화된다면 역설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분명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dznHaju4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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