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까뮈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한 무엇인가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을 때, 대부분의 인간은 무력감을 느낀다. 이때 삶에 대한 권태와 의문, 놀라움과 의식이 시작된다. 몸과 정신이 하나가 되었던 몰입의 경험이 끝나면 인간은 자신에게 낯섦을 느끼며, 가장 명징하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까뮈의 말을 빌리면, 이것이 부조리의 경험이다. 인간의 이성은 완전한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불행하게도 완전무결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이고, 과학적 진리조차도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폐기된다. 따라서 부조리는 숙명적이다. 이성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뿐이다.
인간은 부조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래에 대한 희망에 몸을 던지거나, 혹은 자살을 택한다. 하지만 각 선택은 뚜렷한 한계에 봉착한다. 1) 많은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신)를 세계에 개입시킴으로써 부조리의 문제를 그에게 전가하려 한다. 그러나 미래는 불확실성의 영역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은 거짓되다. 영원과 내세를 약속하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이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희망적 상상력을 통해 문제로부터 비약하는 것이다. 2) 부조리에 맞서지 않고 스스로 삶을 끝내는 것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한 의지나 노력이 없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인간 정신과 세계의 숙명적이고 근원적인 대치를 견디지 못하고 그저 전자제품의 콘센트를 뽑듯 삶을 꺼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부당한 심판을 받아 삶의 의미를 잃더라도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이나 사후의 희망을 거부하면서 오직 끊임없이 반항해야 한다. 까뮈는 부조리에 관한 논의로부터 위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까뮈가 이야기하는 반항은 부조리를 인식하더라도 이를 외면하지 않고, 이에 대한 명찰을 간직한 채 다시 유한한 인간의 삶 속으로 되돌아와 버티며 사는 것이다. 그는 시지프로부터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지프는 온 힘을 다해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린 바위가 계속 비탈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다시금 끊임없이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린다. 그는 부조리한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태를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로 인정한다. 막연히 이 부조리가 언젠가 끝날 것을 기대하기보다, 눈앞에 놓인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보통의 하루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을 반복하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며, 이렇게 그의 운명을 넘어선 존재가 된다. 그것만으로 삶의 이유는 충분하다. 까뮈는 시지프와 같은 인간을 부조리한 인간이라 칭하며 부조리라는 죽음으로의 초대를 삶의 법칙으로 바꾼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부조리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까뮈의 결론은 다소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부조리 상태를 타개하는 어떠한 방법을 제시하기보다 그저 인지하고, 버티고, 반항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약으로 가득한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거나, 듣기 좋은 말들로 거짓 희망을 심어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이성적인 추론의 과정을 거쳐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고 가장 현실적인 조언을 주고 있을 뿐이다. 삶의 권태라는 혼란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까뮈는 감정적인 공감보다는 이성적인 진단을 통해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까뮈가 스스로 '가장 철학적 문제'라고 칭하는 자살의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살아가라는, 소중한 삶을 지켜내라는 그만의 냉소적인 위로이지 않을까.
나는 나의 시대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의식하기에 이 시대와 일체가 될 것을 결심했다.
승리로 끝날 대의들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패배로 끝날 대의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오, 사랑하는 이여,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마라, 다만 가능성의 들판을 끝까지 내달려라.
- 핀다로스 <아폴론 축제 경기의 축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