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심부름

아버지들

by 유재복

아버지, 슬픈 이름


어서 문 닫아 애들 깰라

찬바람이 얼굴을 확 문지른다

새벽일 나가시는 아버지

어둠 속에 희미하게 서 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기고 오그라든다

딱딱하게 언 아버지 발소리까지 지워진 한참 뒤에도

또 다른 문처럼 어둠 속에

엄마는 오래 서 있었다

엄마가 데리고 들어오는 또 한 번의 찬바람에

눈이 시려 그만 눈물이 났다


아버지,

늘 슬픈 이름이었다




아버지들


아버지가 쉬는 날이다.

아니 아버지들이 쉬는 날이다.


집에 있는 아버지가 무섭거나 심부름시킬까 봐 이른 시간부터 마당엔 아이들이 북적였다. 우리는 한쪽 구석에서 말 타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봉택이와 짝이었는데 세 번이나 가위 바위 보에서 져서 연거푸 말이 되었다.


치완이가 킬킬거리며 놀린다.

“이번에도 지면 바꿔”


용진이가 등에 올라탔을 땐 버틸 만했는데 치완이가 뾰족한 엉덩뼈로 내리찍어 하마터면 무너질 뻔했다.


“가위 바위 보”


우리가 이겼다. 말이 바뀌는 순간이다. 하필 그때 봉택이 누나가 봉택이를 부른다.


“아버지가 오래”


봉택이가 누나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에이, 짝이 안 맞으니 말 타기는 끝났다. 우리는 말 타기 하던 담벼락에 기대고 쭈그리고 앉아 아직도 아프다는 강띵이 형 얘기를 하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서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래서부터 타고 넘는 데 고무줄로 만세를 하자 성혜가 물구나무를 서서 걸다가 넘어진다. 구경하던 우리가 킬킬거리다 눈을 흘기더니 한쪽에서 동생을 업고 구경하던 미경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받아 안았다.


미경이는 고무줄 도사다. 하지만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고 놀이에 자주 끼지 못한다. 아이를 맡긴 미경이가 휘리릭 순식간에 고무줄을 걸고 돌아내린다. 또다시 포대기로 동생을 업은 미경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고무줄놀이는 계속된다.


용진이가 손에 무언가 쥐고 있다. 유리조각이다. 고무줄이 가슴까지 올라갔다가 입까지 올라갔을 때 용진이가 튀었다. 용진이에겐 고무줄 끊기 놀이인 셈이다.


“야, 용진이 너…….”

끊긴 고무줄에 얼굴을 맞은 성혜가 뛰어온다. 헤헤헤 용진이는 부리나케 골목으로 뛰어간다. 어어?


동생을 업은 미경이에게 용진이가 목덜미를 잡혀 끌려 나온다. 쫓아가던 성혜에게 잡혀 오지게 꿀밤을 얻어맞는다. 용진이는 덩치 큰 두 여자애한테 잡혀 쩔쩔맨다.


“야야 그만해”

“뭘 그만해”


성혜와 미경이가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그 사이에 용진이는 빠져나가며 메롱 메롱 약을 올린다. 여자애들이 달아나는 용진이를 돌아보다가 나에게 눈을 흘긴다.


“젠장, 괜히 참견했네’


나도 머쓱해져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앞에서 마주 오는 운도의 털모자에 꿩의 기다란 꼬리털이 꽂혀 있다.


“너 그게 뭐냐?”

“히히 멋있지? 집에 아직도 많아”


나는 토기장을 들여다보았다. 없다. 엄마의 날렵함을 증명해 줄 화려한 장끼는 없고 집안에선 아저씨들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마루엔 동네 아저씨들이 앉아 있었다. 술상 위에 커다란 양은 냄비가 올려져 있는 걸로 봐서 꿩은 이미 거기 들어가 있을 거였다.


목수 박 씨 아저씨와 용진이 아버지도 계셨다.

“안녕하세요?”

“오냐, 얘가 둘째지? 또또라고 했나?”


내가 인사를 하자, 안쪽에 앉아 계시던 대머리가 훌렁 까진 승모형 네 아저씨가 인사를 받으며 아버지에게 묻는다. 나는 또또라고 부르는 게 정말 싫었다.


“아니에요, 도도예요”

“도도라고……? 에이 그것도 이상하다.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어?”


그건 나도 궁금했었다. 아버지가 설명을 했다.


“쟤 낳았을 때 시골에 계신 아버님을 모시고 당숙 어른이 올라오셨거든요”

“그래서?”

“그 양반이 작명도 하시는 어른이라 이름을 부탁드렸더니…….”

“허어, 작명가가 지은 이름이야?”

“집안 족보도 관리하시는 분이라, 도자 돌림을 아무리 꿰어 맞춰도 다 있다는 거예요. 내가 운을 띄우면 그건 육촌 아제의 셋째, 그런 식으로…….”

“그래서?”

“하다 하다가, 그럼 도는 어떨까요? 했더니 그건 없다는 거예요. 사주하고도 맞고 좋은 이름이라고…….”

“하하하 그래서 또또가 됐구먼”


어른들이 모두들 웃었다. 나는 놀림감이 된 것처럼 속이 상했다.

“도도라니까요”

“그래 도도, 그런데 몇 살이지”

“이제 열두 살이 돼요”

“그럼 심부름 좀 하렴, 가게 방 가서 막걸리 한 되만 받아 오너라”

하면서 승모형 네 아저씨가 주전자와 돈을 내민다.


“거스름돈은 과자 사 먹고…….”

나는 돈을 받으며 돌아섰다. 술심부름은 하도 많이 해서 훤하다. 20원이 남는다. 나는 가는 동안에 자야를 살까 라면땅을 살까 궁리하며 가게 방으로 향했다.


“몇 놈이나 있냐?”

바닥에 묻혀 있는 항아리에서 바가지로 술을 퍼 담으시며 가게 방 할머니가 묻는다.


“예에?”

“아, 네 아버지랑 술 퍼먹는 눔이 몇 명이냐고?”

“아아 네, 네 분이요”

“고만들 처먹으라고 해라. 벌써 네 엄마가 몇 주전자 퍼다 날랐으니…….”


나는 자야 대신에 라면땅을 두 봉지 샀다. 아무래도 자야 한 봉지를 샀다가 형에게 통째로 뺏길 수 있으니까.


술이 취하면 승모 형네 아저씨는 웃옷을 벗고 러닝 바람에 어깨에 드러나는 장미꽃 문신 그림을 두들이며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내가 술주전자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어깨를 드러난 장미꽃 그림을 툭 치며 주전자를 받아 드신다.


“어여 동상들, 잔들 받어.”


나는 고만들 처먹으시래요. 가게 방 할머니 얘기를 속으로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멀뚱멀뚱 혼자 놀고 있는 선이 앞에 라면땅 한 봉지를 내려놓았다.


선이 하나 나 하나……. 라면땅을 먹으며 밖에서 하는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아도 하나도 재미있는 게 없는데 계속해서 웃음소리가 났다. 아마도 술은 사람을 심하게 웃겼다가 나중엔 화를 내게 만드는 것인가 보다.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는 술에 취해 있으니까.


“어이, 또또야 이리 나와 봐라”

밖에서 승모 아저씨가 부른다. 또 또또란다. 하긴 술 취한 어른에겐 아무리 설명해 줘도 모른다. 또 주전자를 내민다.


“형님 고만 하시지요”

박 씨 아저씨가 말했지만, 승모네 아저씨는 다시 어깨에 있는 장미 그림에 힘을 주며

“허어 이 사람 나아 하나도 안 취했어. 이 인간 박병철이가 왕년엔 말이지.”


하시며 내 손에 돈을 쥐어주신다. 또 이십 원이 남는다.

가게 방 할머니는 나를 보시며 혀를 끌끌 차신다. 난 이번에는 거스름돈을 바지 주머니 한쪽에 집어넣고 가게를 나왔다.


가게에서 우리 집까지는 신작로로 한참을 가야 한다.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어둑어둑해지는 신작로를 걸으며 나는 주전자 꼭지를 기울여 막걸리를 한 모금씩 마셨다.


도대체 이걸 무슨 맛이라고, 이해가 안 된다. 조금 마셔서 그런가 하고 다시 한 모금 마시고 큰 소리로 허허허 어른들 웃음을 흉내 내 보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엄마는 화가 난 게 틀림없다. 부엌에서 우당탕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술주전자를 받아 든 다른 아저씨들은 우리 엄마가 화가 난 것을 아는 것 같은 데 대머리 승모네 아저씨만 모르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방법이 있다. 다시 술 받아오라고 부르기 전에 집에서 없어지는 거다.


“엄마, 내가 가서 형하고 운도 데리고 올게”


다른 때 같으면 선이를 돌봐야 하지만 지금은 선이가 라면땅 먹으며 잘 놀고 있으니까.


“당장 들어와서 씻고 밥 먹으라고 해라. 늦으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린다고 해”


돌아서는 나에게 엄마는 커다란 목소리로 크게 소리를 지른다. 나에게 화내는 게 아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형을 찾으러 동네로 나왔다.



신작로 움푹움푹한 곳엔 덜커덩 괴물이 산다


뭘 하느라고 엄마는…….

어둠이 먹고 있는 신작로를 뛰었다

두부 한 모 사 들고 가겟방 미닫이를 닫자

어둠이 먹어버려 신작로는 보이지 않았다

덜그럭 덜그럭 소리 속을 바라보니

산골 마을 사시는 원삼이네 아저씨가 저만치 가고 있다


덜그럭, 덜그럭

도시락 속 젓가락 소리가 느려졌다

나 따라오라고 걸음을 늦추신 거다

산골 마을까지는 한 시간

그건 어른에게도 먼 거리다

오늘 찢어진 건지 오래된 것인지

아저씨 작업복 왼팔 어깨 구멍으로

산봉우리 넘어오는 달이 들락거린다

미안해서 아랫집 봉호 형네로 뛰어가며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했다

오냐 어둠 속에서 인사를 하신다

살금살금 우리 집으로 가는 앞쪽 어둠 속에서


쩔걱 쩔꺽쩔꺽…….

젓가락 소리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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