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계약직, 이틀 만에 장엄하게 짤리고 마는데!
나의 20대 생활비 충당 수단은 단기 물류센터와 공장 아르바이트였다. 꾸준하지 않지만 나름 다양한 공장, 물류센터 직종에 잔뼈가 있었다는 것. 공장 아르바이트는 사실 어딜 가나 엇비슷한 분위기다. 우주복 같은 방진복을 풀장착해야 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 정도.
단기 아르바이트만으로 연명하던 어느 날, 나름 길게 일해야 하는 근처 공장의 생산 파트 계약직을 지원했다. 최저 시급으로 계산된 월급이었다. 나는 이력서와 면접 확인서(경기도는 면접 보는 청년들에게 일정 금액의 면접 수당을 지역 화폐로 지급한다.)를 꼼꼼히 준비해서 갔다. 대학을 늦게 졸업한 29살. 나는 사실상 그 시도가 인생 최초의 ‘회사 면접’ 경험이었다.
면접은 작은 회사 접견실에서 이루어졌다. 부장님 한 분과 여러 지원자 분들이 모인 다대일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매우 형식적이었으며, 편안한 분위기였다. 면접이라기보다는 부장님이 일에 대해 브리핑하시고, 지원자 분들께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것. 살짝 당황한 점이 있다면, ‘혜빈 씨. 지원자 분들 중 어떤 분과 잘 맞을 것 같으세요?’ 라는 질문. 나는 모든 지원자 분들이 경력도 있으시고 성격도 너무 좋아 보이신다고 솔직하게 뭉뚱그려 대답했다. 그리고 일단 합격했다. 내일부터 출근하면 되며 준비물은 이러이러하다는 안내 메시지를 받았다.
휴게실 겸 탈의실에서 방진복을 착용했다. 먼저 번 면접에서 본 분들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았다. 반장님은 면접을 진행한 부장님에 비해 아주 철두철미하셨다. 교정시력과 길게 일한 경력 등을 묻고, 종이에 꼼꼼하게 적으셨다. 아, 이러면 일하기 힘들 텐데. 하는 멘트도 남기셨다. 첫날부터 반장님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방진복을 착용하고, 장갑을 끼고, 자리에 앉아 지름 3mm 정도의 작은 고리형 부품(뭣에 쓰이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을 일단 작업대에 쏟고, 그것을 하나하나 집어서 작은 칸막이 트레이에 차곡차곡 넣는 것. 그 일을 8시간 반복하는 일이었다. 옆 분과 앞 분의 작업 현황을 살피며 일 속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나는 자신한다. 하다 보니 나름 속도가 붙는다는 생각도 했다. 허나 맞은 편 자리에서 일하시던 조선족 직원분의 속도는 정말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저 분과 내가 감히 같은 시급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이러한 부분도 작업반장님은 다 캐치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나는 고작 1일차 병아리 였는데.
방진복을 입는 생산 공장은 10분이라는 휴식 시간에 탈의 시간, 클린룸(사방에서 바람을 훅 쏘는 밀폐된 작은 장소.)을 거치는 시간이 포함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사자 분들은 대충 방진복만 걸어 두고 작업장과 가까운 휴게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애석하게도 그 중 흡연자는 나뿐이었다.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에 방진복을 사물함에 걸어 두고 굳이 밖으로 나가 흡연 시간을 가졌다. 아니, 그런데 주어진 휴게 시간을 2분 남기고 들어가도 다른 분들은 전부 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반장님의 아니꼬운 눈초리를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확히 출근 한 지 이튿날, 퇴근 후 한 시간이 지난 시점 쯤 부장님으로부터 장문의 문자가 왔다. ‘혜빈 씨,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미안합니다. 반장님이 같이 일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혜빈 씨가요? 다른 분에 대한 얘기 아닌가요? 재차 되물었지만 혜빈 씨에 대한 말씀이 맞다고 하네요. 면접 때 정말 오래 일할 의지가 있는 분인 것을 느꼈고, 그렇게 믿었지만 작업반장님의 의견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이틀 치 일급을 계산 받고 첫 취업(?)시도는 저물었다.
지금도 그 공장 근방을 지날 때마다 생각난다. 내가 사물함에 두고 온 나의 새 치약, 새 칫솔, 방석, 새 쓰레빠, 새 텀블러. (방석을 준비하라고 하시기에 천 소재의 다이소 방석을 가져갔었는데, 반장님께 대차게 빠꾸먹었었다. 이런 건 먼지 날려서 안 된다고. 가죽 소재여야 한다고!) 과장님, 반장님. 제가 퇴근하기 전에 너는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내 짐은 다 챙겨 왔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그 경험을 계기로 더욱 각 잡힌(?) 자세로 다른 생산직 회사에 지원했고, 거기서는 비록 아르바이트 신분이었지만 나름 몇 개월 이상 근무를 지속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모든 것이 내가 시도하지 않았으면 미처 몰랐을 경험이다. 그렇게 정신승리(!?)하기로 한다.
물론 날고 기는 찐 기업(?)에 빡센 스펙과 준비 기간을 쌓고 도전하는 분들께 감히 비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경험을 토대로 생각했다. 이 회사에서 내가 필요 없다고? 그럼 나는 뭐가 되었든 다른 것을 하면 된다. 우리들은 이미 취업 시장에서의 경쟁의 과열과 스펙의 상향평준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물론 이미 사회적으로 ‘제 자리’를 꿰차고 있는 분들도 많겠지만!) 나라도 나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야지. 우리들 개개인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 비록 사회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압박에서 나를 분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종래엔 (종래를 맞지도 않았으면서!)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나 그래도 나름 학창 시절에 노력했고, 이러한 대학까지 나왔는데. 사실 다 필요 없다. 나를 진솔하게 평가할 수 있는 감독관은 사실 나뿐이다.
2021년, 90년대 생이라는 동년배를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고 싶다. 우리는 거절당하거나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더라도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나를 인지하고 컨트롤 할 수 있으면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한 몸은 적게나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늦었다는 생각과 패배감이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나를 맞추기 보다는, 여건이 되는 한 나만의 사회를 살아가고 싶다. 오로지 내 시각과 생각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