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현재까지 세계를 달구고 있는 러시아의 침략에 우크라이나는 서방(나토)의 직접적 도움 없이 굳센 저항을 하고 있다. 러시아 침공 초기 서방 및 국내 언론은 코미디언 출신에 정치 경력 짧은 아마추어 정도로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묘사하며, 일부에서는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집권 세력의 무능함이 러시아의 침공을 유도하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예상보다 강력한 우크라이나군의 저항과 온라인을 통해 노출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항전 메시지는 이러한 국제적 여론에 반전을 주었다. 그는 수도 키예프의 함락 위기 속에서도 국외로 도망가지 않고, 트위터를 통해 국민들의 단결을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무기도 내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우리의 진실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국가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은 이는 우리의 땅, 우리의 나라, 우리의 아이들이며, 우리는 이 모두를 보호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어린시절과 연예인, 기획사 창립자로서의 성공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1978년 소련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 크리프이리(Kryvyy Rih)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가족은 4년 동안 몽골에서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고향 크리프이리는 오랫동안 유태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 외에도 가톨릭, 개신교 등 여러 기독교 공동체도 존재하며, 유태인, 러시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에 이어 폴란드,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등에서 온 이주자들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 그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면서도 우크라이나어와 영어에도 능통했다. 1995년 키예프 국립경제대학교 지역 캠퍼스인 크리비리 경제연구소에 입학하여 2000년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 대학은 2012년 기준 우크라이나 전체 순위 3위, 법학 분야 6위에 해당하는 명문이다.
젤렌스키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지만, 이미 학생시기부터 연극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다른 길을 생각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란 크리프이리의 쇼핑, 유흥 구역이 있는 광장과 사거리를 일컫는 Kvartal 95의 이름을 따서 일종의 개그팀을 만들어 독립국가연합(CIS) 권역에서 방송된 유명한 즉흥 코미디 프로그램인 '웃기고 창의적인 사람들의 클럽'(KVN)의 고정이 되었다. 이후 2003년 이들은 'Kvartal 95 스튜디오'라는 TV연예 프로덕션을 만들었다. 훗날 젤렌스키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Kvartal 95의 핵심 인물들이 행정부 및 안보기구(대한민국의 국정원과 같은)의 요직에 올랐다.
2012년 Kvartal 95와 우크라이나 네트워크 1+1과 합병하여 종합 프로덕션이 되었다. 이 네트워크의 소유자는 우크라이나에서 최고 부호 중 하나인 이호르 콜로모이스키(Ihor Kolomoisky)였으니 젤렌스키와 Kvartal 95는 방송분야에서 우크라이나의 가장 성공한 기획사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이후 2015년까지 젤렌스키는 방송 관련 업무 외에도 사극과 로맨틱코미디 등 여러 영화에도 출연했다.
정치입문: 인민의 종
그의 인생을 180도 전환시킨 것은 불안정한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현실 때문이었다. 2013년 11월 친러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친유럽과 친러의 정치적 갈등에 더하여 지역, 민족간 대립, 경기악화 등으로 나타난 반정부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을 지시했다. 2014년 키예프까지 시위대가 진입하자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도망갔다. 화장실 비데에 샤워기까지 황금으로 치장된 그의 별장이 공개되면서 국민들이 분노를 샀다. 2월 야누코비치는 탄핵되었으며, 2019년 1월 궐석재판에서 그는 국가반역죄로 징역 13년형이 선고되었다.
2014년 5월 제과, 자동차, 조선, 방송 분야의 억만장자 기업가 출신 페트로 포로셴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반군과 만연한 정치부패로 포로셴코 정권은 심각한 도전에 부딪혔다. 또한 2월부터 친러 무장세력이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소속 부대마크도 없는 정체불명의 무장병력이어서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해군이라는 주장도 있음), 3월에는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병력 2천 명을 투입시켰다. 이후 우크라이나에 존속하는 선택조건이 삭제된 크림 자치공화국의 주민투표로 러시아에 귀속되는 압도적 선택이 발표되었다.
이런 상황들이 2015년 10월 1+1의 정치풍자 코미디 프로그램 '인민의 종'이 탄생한 배경이었다. 젤렌스키는 이 때 인민의 종의 주인공 '바실 페트로비치'에 캐스팅되었다. 30대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바실이 우크라이나 정부의 부패에 대해 쌍욕을 퍼붓는 장면을 우연히 한 학생이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 영상이 화제가 되어 대통령까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극에서 바실 페트로비치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이후 젤렌스키가 실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되는 로드맵이 되었다는 점에서, '인민의 종'은 일종의 프리퀄과 같았다고도 볼 수 있다.
TV 프로그램 '인민의 종'
이후 2018년 젤렌스키가 포함된 Kvartal 95가 주축이 되어 정당이 창당되었다. 이 신생정당의 이름이 바로 '인민의 종'이다. 인민의 종은 이제 코미디 프로그램의 이름에서 정당의 이름이 되었다. 둘 다 대중의 인기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대선후보로 등장한 젤렌스키는 처음부터 주목을 받자, 그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1+1의 소유주인 콜로모이스키는 포로셴코 대통령의 강력한 후원자로 그와 공동으로 설립한 PrivatBank가 국유화된 후 여기서 수십억 달러를 횡령한 혐의를 받아 2017년 스스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젤렌스키는 비전통적 선거전략을 선택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짧은 연설이나 코미디 포스트를 주로 활용하며 상세한 정책 성명이나 기자회견을 피했다. 1차 투표에서 그는 30% 이상을 득표하여 1위를 차지했다. 그는 2차 투표 전까지 포로셴코와의 토론도 대체로 거부하고 회피했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 4월 19일, 7만 명을 수용하는 키예프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대선토론은 의미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양측의 기나긴 논쟁의 결과 두 후보의 무대를 경기장 양쪽 끝에 배치하기로 하였으나, 토론 직전 포로셴코가 이를 깨고 젤렌스키와 한 공간에서 함께 있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포로셴코는 젤렌스키를 러시아에 맞설 의지도 경륜도 부족한 정치 초보자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경기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젤렌스키 쪽은 지지자들이 전부 채워지지도 않았다. 당시 서구 언론들도 젤렌스키를 정치 초보로 묘사했고, 그에 대한 지지는 그가 내세우는 정책보다는 포로셴코에 실망한 사람들에 기초한 것이라 폄하했다. 게다가 포로셴코는 기업가 재벌이자 1998년부터 국회의원을 거친 베테랑으로 전통적인 선거방식의 전문가였다. 이런 것을 종합해서 보면, 젤렌스키가 왜 비전통적 방식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기자회견 및 언론을 통한 대선토론이라는 선거 캠페인을 거부한 것은 포로셴코에게 익숙하고 유리한 방식의 구도를 깨고 미디어 기업 1+1의 콜로모이스키와의 의혹을 덜어내는 것이었으며, 소셜미디어와 코미디라는 대중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선거전략으로 자신의 불리함을 극복한 것이다.
그럼에도 키예프 경기장 대선토론에 나온 젤렌스키는 수세에 몰리지 않았다. 그는 "저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 시스템을 깨러 나온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포로셴코를 향해 "저는 당신의 실패의 결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음의 질문을 덧붙였다. "여러분은 밤에 어떻게 주무십니까? 역사상 최고의 부자 대통령을 가진 우크라이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까?"
반부패를 정책으로 내세워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특히 온라인에서 견고한 선거기반을 가지고 2019년 결선투표를 거쳐 현직 페트로 포로셴코에 압승을 거두어 결국 젤렌스키는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우크라이나 제6대 대통령
2019년 5월 20일 젤렌스키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연설에서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를 섞어가며 국가통합을 촉구했다. 이어서 치러진 7월 총선에서 인민의 종은 450석 중 254석을 얻었다. 단 한 석도 갖고 있지 못했던 신생 정당이 우크라이나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정당으로 입법부의 과반을 차지한 것이었다. 이 결과에 따라 젤렌스키 행정부와 인민의 종의 입법부의 뒷받침은 안정적 정국 운영을 구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디어 재벌 콜로모이스키가 귀국하고 새로운 행정부의 인수 절차가 진행되면서 또 다시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또 다시 부상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를 행정부 공직에 앉히지 않을 것을 공언했고, 콜로모이스키 역시 비선실세 같은 역할은 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많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역시 코로나19의 확산을 제한하는 통제 조치를 시행했다. 사업 폐쇄 및 영업 제한이라는 중앙정부의 제안은 2014년 이후 자치권의 영역이 확장된 대도시의 시장들에 의해 반대에 부딪혔다. 전국 정당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인민의 종이었지만 지방 선거에서는 지역 정당들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면서 젤렌스키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하락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질병의 확대,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개혁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고 정체되는 것, 우크라이나 동부의 긴장상태를 마주한 것이다.
2021년 말부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접경지에 대규모 군대를 배치하고 물자를 증강시켰다. 벨로루시와의 합동 훈련이라며 부인했지만 벨로루시와 상관없는 정반대편인 흑해에 해군 함대까지 집결했다. 2022년 2월 21일 푸틴은 도네츠크, 루한스크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두 지역에 "평화 유지군"을 파견할 것이라 발표했다.
2월 26일,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미국,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가 협력하여 러시아 은행들을 SWIFT에서 제거하여 국제금융시스템에서 배제하는 경제적 제재를 단행할 것이라 밝혔다. SWIFT는 11,000여 금융기관에서 사용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 전자메시지 처리 시스템으로 국제적 자금 거래가 이루어진다. 유학이나 여행 등 해외송금에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SWIFT CODE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전부터 러시아가 SWIFT의 대안으로 중국 인민은행이 위안화 중심의 국제결제 시스템인 CIPS(Cross-Border Interbank Payments System, 초국경은행간결제시스템)을 선택하여 최소 23개 러시아 은행이 연결되어 있어, 이번 경제적 제재에 대한 효과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3월 2일, UN 총회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 러시아군의 완전 철수, 도네츠크, 루한스크의 독립 인정 취소를 담은 결의안이 상정되었다. 106개국이 공동발의한 이 결의안에 141개국이 찬성, 5개국이 반대, 35개국이 기권표를 던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의 해외 대피 제안을 거부하고 키예프에 남는 것을 택했다. 2월 25일 밤 그는 혼자가 하니며 함께 우크라이나를 지켜낼 것을 우크라이나와 세계에 알렸다.
"좋은 밤입니다. 당 대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통령실 실장이 여기에 있습니다. 슈미할 총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포돌리야크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가 여기 있습니다. 대통령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군대도 여기에 있고, 시민들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서 우리의 독립과 국가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호자들에게 영광을, 우크라이나에게 영광을! (전체) 영웅들에게 영광을!" (USA TODAY 영상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