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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 Feb 04. 2022

<죄 많은 소녀>, 미지의 공포와 인간의 비합리성

인간의 공포가 폭력으로 변하는 순간에 대해

인간은 미지의 영역에 대해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과 공포로 다가온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 것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인간은 자기를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빈약한 지식과 세계관의 한계 속에서 나름의 논리를 펴서 미지의 영역을 지식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 오해와 편견으로 둘러싸인 불확실한 정보를 여러 사람들이 수용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 마냥 당연히 받아들여야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상에게는 이단아로 낙인을 찍고 폭력까지도 행사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무지라는 공포를 자신의 부정확한 지식으로 합리화시켜 그것을 다수의 생각이라는 힘으로 진실을 덮고 받아들이길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강요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등장하기 까지)

영화 <죄 많은 소녀>는 사람의 잘못된 믿음이나 편협성이 만들어내는 피의 비극을 보여준다.

한 여고에서 경민이란 아이가 실종, 자살하는 것에서부터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실종의 '합리적' 이유를 생산하는 논리를 찾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실종 전날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가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다. 미궁의 사건에서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하는 형사는 전날 경민과 영희가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CCTV의 일부 장면만으로 영희가 경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합리적 추론'을 한다. 


학생을 교육하고 보호해야 할 학교는 그야말로 마녀사냥의 온상지다. 학교가 가진 구조적인 문제로 몰리지 않도록 교장은 학생 개인의 정신적, 일탈적 문제로 몰아간다. 학교에서 학생을 우열반으로 나눠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심하게 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담당 선생은 자살한 학생이 평소에 어두웠고, 그 증거로 경민이 즐겨 듣던 (남들이 잘 듣지 않는) 북유럽 밴드 음악을 내세우며 적당히 수습하려 한다. 이런 흐름 속에 소문과 소문이 합쳐져 경민의 실종, 자살에 영희가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학생들은 영희의 집까지 찾아가 구타를 한다.


무지에 대한 자기 합리화의 끝을 보여주는 존재는 경민의 어머니다. 자신의 딸이 왜 죽음을 선택해야 했는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에 어떤 아이였는지, 가족이란 이름 때문에, 엄마란 이름 때문에 가장 잘 알았어야 한다고 기대되어진 이 존재는 무지의 공포에서 폭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딸에 대해 몰랐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였을까? 이 어머니는 모든 잘못을 영희에게 뒤집어 씌우고 철저히 영희를 망가뜨리려 한다. 그 모든 잘못이 영희에게 가야만 자신이 엄마로서 자격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더욱 독하게 괴롭힌다.


결국 진실은 금방 드러나게 되었다. 영희를 마녀사냥으로 몰아 철저한 희생양으로 삼으며 미지의 영역을 합리화시킨 인간들의 추악한 카르텔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악화되는 사태를 방조했던 교사는 징계를 면하지 못할 위기에 빠지고, 영희를 범인으로 낙인찍어 대강 사건을 정리하려했던 형사는 수사의 허점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마지막까지 딸의 죽음을 남 탓으로 몰아간 경민 어머니에게, 그리고 자살 이슈를 빨리 덮으려는 학교에게 영희는 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스포금지)


모든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해야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지금 '당장' 알아야하고, 모른다 해서 나의 부족한 한계에서 결론을 내려버려야만 하는 것인가?

희생양을 찾는 것은 역사적으로 흔하게 이루어져 왔다. 14세기 흑사병에 유대인은 의도적으로 병을 옮기는 존재로 증오와 비난을 받아 1349년 2,000명의 유대인들이 전염병을 옮긴다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다. 지금에 와서 질병을 인간이 의도적으로 퍼뜨린다는 것으로 마녀사냥질을 해대는 것에 과거 사람들의 무지함을 비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도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코로나19라는 갑작스럽게 너무나도 크게 등장한 미지의 두려움 앞에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든 찾아 비난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소수집단, 약자들이다. 그 비난의 대상들 중 지금까지도 너무나 합리적이고 온당한 비판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대상이 얼마나되는지 우리는 아직도 분별할 능력이 부족하다.


앞으로 등장할 또 다른 미지의 영역을 인간은 또 무엇을 희생시켜 공포를 잠재우려 할 것인가?


이 인간의 비극을 멈추게 하는 장치를 이 영화를 만든 김의석 감독은 '죄책감'을 제시한다.

감독은 자신의 실제 삶에서 겪었던 일을 표현한 작품이었다고 말한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여러 사람들이 느끼는 죄책감이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는 기제로 작동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영희는 타인들에게 가해자로 의심을 받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가장 의심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다른 인물들도 (죽은 아이와) 친소에 따라 다르겠지만, 죄책감이라는 동력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연합뉴스 2018년 9월 9일 인터뷰 기사 중)


감독이 말한 죄책감을 '성찰'로 끌어올려 제시하고 싶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의심하며 되묻는 과정을 거치는 것에서 내가 붙잡고 있는 아집과 자기합리화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틈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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