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생각하나 8

믿음을 잃어버린 왕

by 한가람

믿음을 잃어버린 왕이 있었습니다.

넓디넓은 궁궐의 넓디넓은 방에

홀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요.

왕의 곁에는 왕비도, 왕자도, 시종도, 신하도 없습니다.

텅 빈 침묵만이 왕을 지켜보고 있었지요.


처음부터 왕에게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왕은 패기 넘치는 용맹한 군주였지요. 백성들은 강인한 그들의 왕을 자랑스러워하고 신뢰했답니다.

현숙하고 지혜로운 왕비와 품위 있는 네 왕자는 왕가의 자랑이자 백성들의 자존심이었지요.

백성들은 왕가를 칭송하고 사랑했습니다.


왕 또한 백성들을 아꼈습니다.

늘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애썼지요.

한 가지 거슬리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수시로 국경을 넘보는 이웃나라였습니다. 화친을 맺어보려고도 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예 복속시켜 더 이상 이 땅에 전쟁이 없게 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왕에게는 뛰어난 지략을 가진 장군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우이기도 했지요.

그와 함께 왕은 최전방에서 적에 맞서 싸웠습니다.

전쟁은 계절을 바꾸며 이어졌지만 결국엔 승리했습니다.

왕도 백성들도 너무 기뻐 환호하고 축제를 열었지요.


왕은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장군을 재상으로 임명했습니다. 그의 현명함과 지략이라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큰 힘이 되리라 생각했지요.

백성들도 훌륭한 결정이라며 용맹한 왕과 지혜로운 장군이 열어갈 새 시대를 기대했어요.


그렇게 좋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학식이 뛰어나고 어진 첫째 왕자를 후계자로 삼고 빠르게 나라를 안정시켜 나갔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들어가고 있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호방하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왕은 사냥도 자주 다니고 왕성에서 며칠씩 잠행도 나갔답니다.

백성들의 삶도 살펴보고 나라의 상황도 직접 살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왕이 궁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났고 재상이 대신해서 국정을 돌보는 날들도 늘어갔지요.

신하들이 재상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경우도 있었지요.


하루는 왕비가 염려를 담아 잠행을 줄이시라 부탁을 드렸지만 왕은 재상이 잘하고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 말했지요.

하지만 왕비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재상이 훌륭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권력이 신하에게 기우는 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었으니까요. 고민하던 왕비는 재상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렇게 여러 날이 흐르고 나서 '그날'이 갑작스럽게 닥쳐왔습니다. 신하들 중 몇몇이 재상이 저지른 비리에 대한 증거를 들고 왕 앞에 나타났어요.


재상은 그동안 국고를 빼돌리고 돈을 받고 관직을 팔기도 하고 각종 이권에 개입해 자신의 재산을 불리고 있었던 거였어요.

왕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증거가 너무나 명확했지요. 왕비의 부탁으로 재상 편에 들어가 정보를 모았던 신하들이 제출한 증거였으니까요.


왕은 재상을 붙잡아오라 명령했고 눈앞에 나타난 재상에게 정말로 본인이 한 일이 맞느냐 물었어요. 재상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나라가 이렇게 부강해진 것은 자기 덕분이니 이 나라를 다 준대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답했지요.

왕은 믿을 수가 없었어요.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던 장군이 아니었어요. 무엇이 널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이냐고 울부짖던 왕은 재상을 처형하라 명령을 내렸지요. 생사를 함께 넘나들며 서로를 지켜주던 벗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그날 이후 왕의 마음속에는 거스러미가 자라기 시작했어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고 모든 행동들이 수상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신하들의 간언은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느껴졌어요. 자꾸만 화가 나서 트집을 잡아 내쫓거나 감옥에 가두기도 했죠.

신하들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어요.

점점 간언을 하는 신하들이 줄어들었고 왕의 비위를 맞추는 신하들이 늘어갔어요.


보다 못한 왕비가 나서서 왕께 충언을 드렸지만 왕은 듣지 않았어요. 오히려 권력이 탐나느냐며 별궁에 유폐시켜 버렸어요. 이 소식을 들은 첫째 왕자가 왕께 용서를 구했어요. 어마마마를 풀어달라고요. 하지만 왕은 왕비를 편든다며 불충하다는 이유로 첫째 왕자를 변방으로 쫓아버렸어요.


둘째 왕자가 후계자가 되었어요. 둘째 왕자는 용맹하고 무력은 뛰어났지만 국정을 돌보는 일은 서툴렀어요. 당연하게도 후계자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왕은 그런 사정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어요.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늘 꾸짖다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분쟁지역으로 보내버렸어요.


셋째 왕자가 다음 후계자가 되었어요. 셋째 왕자는 쾌활하고 사교적이어서 친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어요. 놀러 다니기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했지요.

하지만 후계자가 되고서는 더 이상 그렇게 살 수가 없었지요. 셋째 왕자는 점점 지쳐갔어요. 끊임없이 지적하고 간섭하는 왕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죠.

그래서 어느 날 정말로 미친 척하고서는 요양을 핑계로 궁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작은 도시로 가버렸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신하도 더 이상 왕에게 간언 하지 않았습니다. 붙잡아줄 대상이 사라진 왕은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갔어요.


넷째 왕자는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왕이 부르기 전에는 절대 먼저 왕을 찾지 않았어요. 귀족들과의 교류도 끊었지요. 그저 자신이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듯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듯이 행동했어요.

그렇게 넷째 왕자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지우고 있다가 이웃의 작은 나라와 화친의 상징으로 부마가 되어 가버렸어요.


왕비도 왕자도 모두 쫓아버린 왕은 가식으로 가득 찬 이들에 둘러싸여 위태로운 평온함을 이어갔어요.

왕은 점점 공허했고 그것을 메우고자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맸어요. 약삭빠른 신하들이 옆에서 더욱 부추겼지요.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너무 지쳐 흐려진 정신으로는 경고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어요.




첫째 왕자는 변방을 지키며 시린 겨울을 반복해서 맞았습니다. 왕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후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정기적인 보고는 올렸으나 사적인 연락은 모두 차단되었지요. 몰래 지인을 통해 별궁에 유폐된 왕비와 일 년에 두어 번 겨우 연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왕비가 병든 것을 알았지만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첫째 왕자는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 이후 첫째 왕자의 마음도 차디찬 얼음으로 덮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왕을 아비라 생각하지 않았고 변방에서 조용히 세력을 키웠습니다.


둘째 왕자는 전쟁터를 계속 돌았습니다. 결코 환궁하라는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비가 자신에게 죽으라고 명령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노와 고통이 둘째 왕자의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었지요. 전장을 돌며 친분을 다진 장수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첫째 왕자와 손을 잡았지요.


셋째 왕자는 작은 도시에서 조용히 살아갔습니다. 정말로 요양을 하는 듯이요. 하지만 실상은 대리인을 내세워 타고난 사교성과 감각으로 상단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중앙에 필요한 물자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요. 시기를 맞춰

지방의 특산품을 중앙으로 내다 팔며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에서 충분한 물자를 공급해 줄 수 있었습니다.


넷째 왕자는 특유의 온화함으로 이웃나라의 궁성에 잘 적응하여 그 나라 왕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며 돕고자 하는 공주덕에 언제든 다른 왕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가 되었지요. 넷째 왕자는 진정한 부마가 되었어요.




듣기 좋은 말만 쏟아내던 신하들에 둘러싸여 있던 왕은 향락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광증이 치밀어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왕이었기에 아무도 문제 삼을 수 없었습니다.

왕은 점점 쇠약해졌고 나라도 점점 쇠락해 갔습니다.


왕이 몸져누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째 왕자는 동생들과 힘을 합해 왕성으로 쳐들어 갔습니다.

제대로 된 훈련을 한 적이 없었던 왕성의 군대는 쉽게 무너졌고 덕분에 왕자들은 수월하게 왕성으로 들어왔습니다.


넓디넓은 왕성의 복도에 왕자들의 발소리가 울렸습니다. 왕자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인 왕을 찾았습니다.


그는 노쇠하였고 총기를 잃었고 잡으면 부러질 것 같은 몸을 하고서 침상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곁을 지키는 이 하나 없이.

넓디넓은 침실의 넓디넓은 침상에 홀로 누워 있었지요. 왕을 본 왕자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침묵이 흐르고 첫째 왕자가 마침내 왕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왜 그러셨나요?"

첫째 왕자의 말이 차가운 침묵을 깨고 공허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왕은 힘겹게 눈을 뜨고 첫째 왕자를 돌아보았습니다.

알아보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그 말만으로도 힘이 다한 듯 왕은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첫째 왕자는 절규했습니다.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분노와 상처와 미움과 애절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둘째 왕자는 벽과 문을 내리쳤습니다.

셋째 왕자는 허탈한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고 넷째 왕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형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자들도 이제 모두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왕성에는 조기가 걸렸습니다.

'왕이 죽었다. 첫째 왕자가 돌아와 왕위를 계승한다.'

포고문이 내려지고 백성들은 이제 살았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첫째 왕자는 현명하고 어진 군주가 될 사람이었으니까요.


넷째 왕자가 이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왕이 된 첫째 왕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왕은 아우를 붙잡았습니다. 너의 나라는 여기가 아니냐고 원치 않는 혼인이었을 텐데 그냥 여기서 같이 살자고 말입니다.


넷째 왕자는 가만히 형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알던 형님이라면 오히려 제게 의리를 지켜야 하니 돌아가야 한다 말했을 거라며 어려울 때 도운이를 저버리면 안 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형님이 본래 형님의 모습으로 남기를 바란다며 떠나갔습니다.


왕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그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모후를 잃고 변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신을 살게 했던 것은 분노와 증오였으니까요.


갈 곳을 잃은 분노가, 미움이 이제 자신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괜찮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이제 왕이니까요.


둘째 왕자도 작별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자신이 군권을 쥐고 있어서는 안 되니 떠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무엇을 할 것이냐는 왕의 물음에 여러 나라를 여행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여비나 잘 챙겨달라며 웃으면서 떠나갔지요.


셋째 왕자는 자신이 머물던 지방으로 내려가겠다고 했습니다. 그곳이 마음 편하다고요. 가끔 좋은 물건을 들고 찾아뵙겠다고 인사하고는 떠나버렸습니다.


동생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 마음을 알았기에 왕은 동생들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긴 시간 홀로 견뎌내야 하겠지요.

왕의 자리란 그런 것이니까요.


믿음을 잃은 왕이 있었습니다.

그 상처를 이겨내지 못해 왕비와 왕자들을 저버리고 결국엔 자신마저도 저버렸던 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들도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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