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인의 가게에 놀러 갔다
작은 원형 테이블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아담한 카페다.
한적한 주택가라 손님이 많지는 않다.
근처에 학교가 있어 꼬마 손님들이 종종 들른다.
지인은 그 꼬마 손님들의 소소한 질문들에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응대하며
"애들 너무 귀여워."라고 한다.
그 모습이 좋아 보여 웃으며 "그래"라고 답했다.
음료를 만들고 주문받은 토스트를 만드는 모습이 공간과 어우러져 참 잘 어울렸다.
손님이 뜸해진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들 이야기, 살림 이야기, 나이 들어감에 대한 이야기,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등 여러 주제를 오가며 세 시간 가까이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하 호호 웃기도 하고 뭉클해져 눈가도 적시며
이야기삼매경에 빠졌다.
말미에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오랜만에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인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가게에 매이다 보니 자신이 움직여서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가 쉽지 않아 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가 생각났다.
친가도 시가도 타 지역이어서
난 소위 말하는 독박육아를 했다.
당시에는 그런 말도 없었고
남편이 일을 하고 있으니
집안일과 육아는 내 몫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다행히 첫째는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이웃이
몇 집 더 있어서 같이 어울리며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그마저 아이들에 집중이 되어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즈음 성인 어른과 방해받지 않고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올라왔던 기억이 있다.
아기는 말을 못 하고 혼자 떠드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아기가 있는 집은 그럴 수밖에 없다.
누가 아기를 대신 봐주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아, 순한 아이를 키운다면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실제로 당시 이웃의 한 아이는 젖먹이임에도 9시에 자서 6시에 일어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신기했고 부러웠다.
내 아이는 잠투정도 심했고 거의 한두 시간마다 깼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집중해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대화가 고팠다.
동생들이 태어나고 아이들끼리 말을 주고받고
나도 말할 상대가 늘었지만
'아기어(語)'를 모두 아실 것이다.
한 문장에 들어가는 단어는 3~5개이고
문장이 이어지지도 않고 내용도 단순하다.
두 문장 이상으로 이어지는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의미가 담긴 문장을 주고받으며 뇌를 자극하고 싶었다.
내 생각을 나누고 상대의 생각도 나누며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경험이 필요했다.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힌 듯했다.
아이들이 어린이 집에 가고
나도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자
그러한 순간이 찾아왔다.
의미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순간말이다.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면이 있고
그 다양한 면들이 골고루
조금씩이라도 채워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채워주는 존재들이
주위에 있음을 알아차려보자는 이야기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해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감내하고 살아간다.
때로는 그 역할이 너무 중요해져
자기 자신은 흐려지기도 하는 듯하다.
그럴 수 있다.
생에 주어진 과업이 만만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다만 그러한 때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끝이 없어 보이는 사막을 횡단하며
상인들이 오갈 수 있었던 이유는
오아시스가 있어 목을 축이고 쉬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급하다고 쉬면서 물을 보충해야 할 오아시스를
건너뛰어버리면 시간을 줄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만큼 위험해진다.
우리 삶에 오아시스는 얼마나 있을까?
마음이 맞는 사람과 유익하고 즐거운 대화시간은
분명 오아시스다.
그래서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지인이 고맙다.
할 일을 잠시 미루고 지인을 찾아간 자신이 기특하다.
목적 없는 만남이 전해주는 평온함과
계획하지 않은 시간이 전해주는 우연성이
반가운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