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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람 Jun 11. 2024

배려의 향기

이십 년 전쯤의 일이다. 

일이 있어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었다.

차창밖 풍경을 보다 눈을 감고 쪽잠을 자다 하고 있었는데 

대각선 방향으로 대학학생처럼 보이는 20대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주위를 배려해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면서 대화하고 있었는데 밝고 활기차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몰래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좋을 때군.' 

잠시 뒤 정차한 역에서 어르신 한분이 올라타셨다. 

좌석을 찾을 생각도 안 하시고 서있기 편하신 쪽에 기대셨다.

'아, 입석표를 끊으셨나? 어디까지 가시지?'

(지금은 기차표가 모두 좌석만 발행되지만 그때는 입석이라고 해서 서서 가는 표도 발매했었다. )

'자리를 양보해 드릴까?' 고민하는 사이에  

학생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서 자신들의 자리로 어르신을 모셔왔다. 

어르신의 사양하는 목소리와 학생들이 좌석을 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은 연신 고마워하시면서 학생들 중 한 명의 자리에 앉으셨고

자리를 양보했던 학생은 팔걸이에 걸터앉아 일행과 다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중간중간 학생들끼리 자리를 바꾸었고

그렇게 3개의 좌석을 4명이서 나눠 쓰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불편함은 전혀 없다는 듯 밝은 표정의 그들이 아까보다 더 밝아보였다. 




뚜벅이인 나는 어딘가를 갈 때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시내버스, 시외버스, 지하철, 경전철을 애용하고 있다. 

시내버스를 타다 보면 운전하시는 분들의 스타일이 다양함을 알게 된다. 

어떤 분은 살짝 거침없이 운전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고

어떤 분은 부드럽게 운전하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승객을 대하는 태도도 다양하다.

정류장에서 사람을 태우고 내려주는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한 분이 있는가 하면

가벼운 인사를 건네시는 분들도 있고

차내에서 안전사항에 대해 강조를 하시는 분들도 있다. 

음악을 틀어 놓는 분도 있으시고

뉴스를 틀어 놓는 분도 있으시다. 

조용히 그냥 있는 분도 있으시다. 

가끔 활짝 웃으시며 반갑게 인사해 주시는 분들도 있으신데

그럴 때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게 되고 기분이 좋아진다. 


한 번은 무선 마이크를 착용하고 계신 기사님의 차에 올라탔다. 

올라탈 때도 "어서 오세요!" 하며 밝고 친절한 목소리로 맞이해 주셨고 

정류장에 승객을 내릴 때도 "안녕히 가세요!" 하며 밝고 친절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셨다. 

매 정류장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계셨다. 

자신의 차를 타는 승객들 모두에게 마치 밝은 에너지를 전해주려는 듯 말이다. 

승객들이 다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이제 출발합니다 꼭 잡아주세요!"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속으로 '저렇게 하기 쉽지 않으실 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정류장에서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타셨다. 

한눈에 보기에도 기력이 쇠하셔서 움직임이 느리셨다. 

슬로 모션을 보는 듯한 느린 동작으로 버스에 올라타셨고 

자리를 찾아 앉으시는 것도 느리셨다. 

어르신이 올라타시고 자리에 앉으시는 동안

기사님은 "천천히 올라오세요." "자리에 앉으시면 출발할게요."라며 어르신을 살피셨다.

그 어르신은 두 정거장인가 세 정거장을 가서 내리셨는데 

내리실 때도 기사님은 "천천히 내리세요." 하시며 

어르신이 완전히 땅에 발을 디디고 손잡이를 놓으시고 나서야

"이제 출발합니다."라고 경쾌한 음성으로 이야기하시고는 출발하셨다. 

개인적인 접점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공간을

자신만의 색채로 채워놓으신 기사님 덕에 그날 하루종일 따스함을 느꼈던 것 같다.




한국인은 문에 적힌 당기시오(PULL)과 미시오(PUSH)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밀기(PUSH)만 한다는 것이다. 직진본능이라나?

20대의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당겨야만 열리는 문도 '당기시오'를 읽지 않고 밀다가 안 열리면 그제야 문에 있는 '당기시오'문구를 확인하고

구시렁거리며 문을 당겨서 열고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문은 밀어서 연다는 기본값이 장착되어 있었던 것 같다.

밀고 들어가는 것이 익숙해서였는지는 몰라도 내가 밀고 들어간 문을

붙잡는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직진! 뒤는 돌아보지 않음.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20대 중반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떤 건물의 출입구를 들어가는 데 내 앞에 들어갔던 분이

문을 잡아주고 계셨다. 

순간 조금 당황했던 것도 같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기도 했고 낯선 친절이 어색했던 것 같다. 

자동적으로 "감사합니다."하고 건물에 들어갔는데 

튕겨져 나오는 문에 혹시나 부딪힐까 붙잡아주신 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이 가슴까지 내려왔다고나 할까?

그날의 경험 이후 나는 '미시오'의 문을 통과할 때 손으로 문을 잡고 열고 

손을 놓기 전에 뒤를 한번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 배려의 힘

타인을 위해 1분 내외의 시간을 들이는 일

하고 나면 내가 행복해지고 받을 때도 내가 행복해지는 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살만한 곳임을 느낄수 있는 일

혹은 눈송이 하나만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

내가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는 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일

내가 누군가를, 누군가가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우리 내면의 좋은 부분을 더 키워 나갈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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