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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람 Jun 26. 2024

밤의 창가에서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밤이 내려앉는 시간은 평화와 고요의 시간이다.

불을 끄고 창밖을 바라보면 좀 전엔 이쪽이 밝았고 밖이 어두웠는데 이제는 밖이 밝고 이쪽이 어둡다.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소리,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는 밤의 넉넉함 속으로 사라진다. 

어둑어둑한 실내에서 밖을 바라보면  네모난 불빛들이 등롱처럼 군데군데 떠있다.

아마도 나처럼 밤늦게 깨어 있는 이이거나 할 일이 아직 남은 이들이 밤을 빛으로 메우고 있는 것일 테다.

잠 못 든다 해서 힘들지는 않다. 오히려 밤이 주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한껏 시간과 공간을 누리게 해 준다.

 

이런 밤에는 나에게로 산책을 떠난다.

날이 선 마음을 만날 때도 있고 넉넉한 마음을  만날 때도 있다. 

행복한 마음을 만날 때도 있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만날 때도 있다.

깊은 슬픔을 만날 때도 있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만날 때도 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만날 때도 있고 세상일 별거 없다며 단단해지는 마음을 만날 때도 있다. 

밤의 창가에 앉아있는 것은 그대로이건만

마음이란 녀석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날 선 마음을 만나는 날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그 시간이 날을 무뎌지게 하고 예민함을 다독여 평정심을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순간 치솟았던 불쾌한 감정들과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생각들은 의미 없이 흩어진다. 그래, 이 또한 지나가리니......  네가 옳고 내가 옳고,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리고, 분별심에서 유발된 갈라 치기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거북함과 꺼림칙함 답답함을 가져올 뿐이다. 언제 우리가 완벽한 적이 있었던가? 불완전한 우리가 만들어내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뿐, 각자 옳다고 믿는 신념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계속 날을 세우면 대립과 분쟁이 일어날 것인데 그것이 정말 바라는 바인 것인가? 사고를 확장하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마지막까지 타협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요구되는 기능일 테지. 나의 평화와 너의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각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타협점을 찾는다면 관계는 유지가 될 것이고 아니라면 관계를 끝맺음해야 할 테지. 아니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음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것 모두 각자의 마음에 달린 일이고 혼자 날 세운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을 이어갈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 결국 나 자신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행복한 마음을 만나게 되는 날에는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마음속에 꺼리는 것이 사라지고 평화롭고 따뜻해진다.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세상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내면에서 만족과 감동이 출렁인다. 좋은 품성이라고 부르는 연민, 배려, 이해, 존중, 상냥함 등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평상시 생각해보지 않았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로움과 자연이 주는 고마움에 대해서도 저절로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즐겁고 충만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이만하면 잘 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며 사유할 수 있는 인간임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이런 순간이 나에게 얼마나 있었는지를 말이다.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생각보다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힘든 순간은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빨리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해보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삶을 살아내기 위한 훌륭한 자원이 되어줄 테니 말이다.


고통에 잠기는 날에는 밤의 어둠이 장막처럼 둘러져 그 속에 머무를 수 있다. 이 때는 음악도, 좋은 글도, 아름다운 그림도, 가슴 찡한 이야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마음속 고통이 흘러지나 가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흘러가면 나 스스로 알게 된다.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 볼 순간이 왔음을 말이다. 시작은 고통이나 그 걸음 속에서 무엇을 느끼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해볼 만하다. 


한발 한발 지나온 삶의 순간들을 마주한다. 고통의 근원은 그 어디쯤인가에 있다. 어떤 것은 선명하게 느껴지고 어떤 것은 흐릿하다. 굳이 선명하게 보려 노력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고,  지나간 과거 속에 존재했으며, 현재의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음을 알게 될 뿐이다. 그리고 계속 걸음을 옮긴다. 어떤 순간은 지나치지만 어떤 순간은 발걸음이 쉽게 떼 지지 않기도 한다.  느끼게 해 줄 것들이 더 남았나 보다. 잠시 머무르면서 가만히 있어본다. 무언가가 느껴지고 사라지고 또 느껴지고 사라진다. 무겁기만 했던 감각들이 조금씩 가벼워지고 발걸음을 뗄 수 있다. 그렇게 나를 만난다. 


평화롭게 살고자 애쓰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어쩔 수 없이 내려놓은 가치들, 맞서고 싶었으나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물러섰던 소심한 순간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무기력했던 순간들, 생각의 방향성이 너무 달라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던 순간들, 붙잡고 싶었지만 보내야 했던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나의 내면에 모두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을 수 있음도 알고 있다. 행과 불행은 한 몸이고 기쁨과 슬픔도 한 몸이며 평온함과 고통도 한 몸이니 말이다. 밝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밝음만 존재한다면 그것이 밝은 것임을 어찌 알까? 그러니 괜찮다. 느껴지는 것에는 아무 편향이 없다. 우리가 밝음만 취하려 해서 편향이 일어나는 것이니까. 


느껴지는 것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보통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힘들었던 일이 있었다면 우리의 뇌는 그것을 기록해 둔다.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다시 힘들어질 수 있으니 잘 대비하라고 말이다. 그래서 유사한 일이 발생하면 미리 신호를 보낸다. 불안해지거나, 두려움을 느끼거나, 감이 좋지 않거나, 몸이 아프거나 하는 형태로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유사한 일'에 있다. 처음 겪었던 일과는 상황과 대상이 달라서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는 위험 신호를 보내고 우리는 그것을 위험으로 인지하게 된다. 이건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니까. 설명을 통해서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도 크게 소용이 닿지는 않는다. 여전히 뇌는 위험으로 인식하고 몸은 알아서 반응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의 많은 부분이 이렇게 작용한다. 위험이 아닌데 위험으로 받아들이거나 적은 위험인데 큰 위험을 받아들이거나 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뛰어난 두뇌 활동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기도 전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고통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학습된 형태로 그 고통을 마주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고통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빨리 피하라!'

이 메시지에 휩싸이는 순간 사유는 어렵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펼쳐지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도망칠 것을 종용한다. 그런데 도망칠 수 없다면? 스스로 생각해도 과장되게 생각하다고 느껴지거나 사회적 지위, 체면, 관계 때문에 그 자리를 지켜야만 한다면?  


심호흡을 해보자 그리고 머릿속 시끄러운 소란이 가라앉기를 기다려보자. 당장 벗어나려고 애쓰기보다 고요히 그 마음을 지켜보자.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으며,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지켜보자. 그리고 마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 그랬구나!', '아, 이렇게나 슬펐구나!', '아, 이렇게나 힘들었구나.', '아, 괴로웠구나.', '아, 외로웠구나.' 자신의 마음을 알아봐 주고 토닥여줘 보자. 내가 나와 가까워지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이며,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나와 가까워질 때 우리의 선한 본성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마음의 여유란 내면의 건강함과 직결되니 말이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무언가를 결정 내리지 말고 일상을 유지하면서 그 어지러움을 관찰해 보자. 처음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점점 더 관찰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최소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부적응적인 방법을 취하지는 않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큰 충격은 소화해 내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고 소화를 잘 해내려면 충분히 자신을 돌보면서 온전히 경험하며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 타인을 통제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뿐이다. 때로는 이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할 수는 있다. 그러니 한 번 시도해 보자. 나의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깨어있는 마음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마음을 지켜보자. 우리의 평안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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