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들뜨게 만드는 일이다. 기분은 고양되고 세상에 어려움은 의미가 없고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시간과 공간 속에 머물며 충만함을 누린다. 상대가 나를 귀히 여긴다는 것을 믿는 동안에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관계가 이어지면 기대도 높아진다. (평범한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이 법칙에 예외는 없는 듯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제공해오고 있는 것들은 기본값으로 변하고 원하는 것이 늘어난다. 인간의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스스로 제어하지 않는 한 욕망을 향한 질주를 멈추기는 어렵다. 그래서 '날 사랑한다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상대는, 또한 '나'도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질적인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관심, 돌봄, 배려, 존중, 태도, 언어 등등 일상을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많은 요소들에서 더 원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도 자신과 다름없이 일상을 지탱하느라 애쓰고 있음을 알기에 그냥 부탁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우리는 알아차리는 것 같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압박을 가하며 자신의 기대를 충족받고자 애쓴다. 한동안은 이런 방식이 유효할 것이다. 관계가 주는 혜택을 내려놓고 싶지 않으니 조금 더 애써보는 것이다. 그 '조금'은 사람 따라 다르다. 정도와 기간에 있어 차이가 존재한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품성은 물론 가치관과 살아오면서 경험한 관계성도 작용할 것이다. 보다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거나 관계에서 좌절을 겪었다면 자신이 손해보지 않거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상대에게 요구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함께하는 것을 추구하거나 관계에서 혜택을 받았다면 다툼이 거북해서(관계가 깨어지는 신호로 느껴질 테니 말이다.) 좀 더 양보하고 상대에게 기회를 주며 계속 상대에게 맞추기도 한다. 이것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다. 각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상대는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상대에 맞게 적절히 대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압박의 형태는 다양할 텐데 핵심은 이거다. '네가 그걸 해주면 내가 이걸 해줄게.' 보통의 인간관계는 상호성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주고받고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유지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주고받고를 너무 재게 되면 관계에 회의가 생겨나는 것 같다. 애초에 똑같이 주고받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데 말이다.
기분 좋을 때의 양보와 배려가 마음이 힘들 때 행하는 양보와 배려와 같을 수 있을까? 형편이 넉넉할 때의 베풂과 형편이 어려운 때의 베풂이 같을 수 있을까?
내가 준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관계에 치명적이다. 친밀한 대상일수록 더 그렇다. 힘의 균형이 대등한 관계라면 치열한 공방이 오가며 다툼을 통해 서로를 더 이해하고 사이가 돈독해질 수도 있고 아예 관계를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결정권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고 결과를 책임질 수 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관계라면 힘이 약한 쪽이 더 많이 감내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저울의 추가 기울었다! 애정에 기반한 관계라면 이럴 땐 더 강한 쪽이 상대가 힘을 가질 때까지 든든히 지탱해 줄 필요가 있다.
양육자와 자녀의 관계가 대표적인 그런 관계이다.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어주고, 격려해 주고, 기다려주고,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
"아니, 잘 못된 행동을 할 때도 편들어주라는 말입니까?"
설마, 당연하게도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잘못된 행동은 교정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틀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성취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진정 어린 사랑이 필요한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실패를 경험하고 움츠러들 때,
실수를 해서 수치스럽고 두려움을 느낄 때,
자신이 생각만큼 능력이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좌절스러워할 때,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알지 못해서 혼란스러워할 때,
강렬한 정서에 휘말려 어쩔 줄 몰라할 때
그때가 사랑이 주어져야 하는 때이다. 아무 조건 없이 말이다.
"실패는 겪을 수 있는 일이야.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괜찮아. 네가 이것을 잘 다루어낼 거라는 걸 알아. 넌 여전히 우리의 소중한 아이란다."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단다. 때로는 한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어. 하지만 네가 한 노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이 순간을 우리는 함께 이겨낼 수 있어."
"실수는 누구나 한단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만회할 수 있는지 배워가는 거야. 오늘 넌 충분히 그 일을 해냈어. 우리는 때때로 어리석어지기도 한단다.'
비난과 판단이 섞인 충고 대신에 우리 삶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양육자도 그런 경험을 했었고, 힘들었음을 표현해 준다면 아이는 무엇을 경험할까? 그리고 그런 힘든 순간이 존재하지만 결국엔 지나가는 것이며 양육자 자신이 그 순간을 넘어왔듯 아이도 그럴 수 있음을 믿는다고 한다면 아이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생겨날까? "난 말이야 이렇게 했어.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해봐."라고 자신의 영웅담을 이야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그럴 때가 있지. 나도 그랬단다.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맛있잖니?" 이 엉뚱한 전개에 아이가 어이없어 할 수도 있다. 웃을 수도 있고. 하지만 절망의 순간을 벗어나게 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해 보자 살아오면서 주위사람의 충고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말이다. 오히려 자신이 더 못나게 느껴진 적은 없는지, 답답했던 적은 없는지, 상대가 잘난 척한다고 느껴졌던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돕기 위해 우리는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한다. 하는 쪽에서는 도움일 수 있으나 받는 쪽에서는 도움인걸 알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이 4가지가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이 4가지는 말하는 쪽이 듣는 쪽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대가 요청하기 전에는 하지 않는 것이 좋고 상대가 요청하더라도 조심해서 하는 것이 좋다.
"네가 그걸 해주면 내가 이걸 해줄게.", "네가 그렇게 하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거야." 대신에
"난 네가 참 좋단다.", "너도 노력하는데 잘 되지 않아서 속상하겠구나."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무언가를 이루어 낼 때만 사랑을 받는다고 지각하고 있다면 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번만 잘못해도 애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잘하든 잘하지 않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믿어주는 대상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은가?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의 행복과 평안을 바라는 일이라면, 사랑하는 상대를 고통스럽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방식은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 한마디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너를 믿는다.
사진출처: 경기도 [한택식물원] 중남미식물 온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