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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람 Jun 19. 2024

존재, 하다

나 여기 있어. '나'를 봐줘.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서로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어떤 때는 길을 잃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관계를 왜 더 힘들게 만들고야 마는 것일까?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온 상대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의 방향성이 어디를 향해야 할까?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에서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 합쳐져서 세상을 읽어내는 자신만의 해석체계를 구성한다. 때문에 우리의 의식구조는 편향되어 있다개인의 경험은 타인과 같을 수 없으며, 한 집안에서 자란 형제자매도 성장환경은 다를 수밖에 없다.(형제자매가 묘사하는 부모상이 얼마나 다른지 알면 놀라게 될 것이다.) 타고난 기질 또한 비슷한 부류로 묶을 수는 있으나 엄밀히 따져보면 똑같은 얼굴이 없듯 똑같은 기질도 없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에 대한 해석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해석체계에 따라 고유한 특성을 가지게 되고 타인과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생겨나게 된다.


 가령 아이가 친구와 다툼이 생겨 싸우다가 얼굴을 맞고 왔다고 하자.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부모 중 한쪽이 자신도 친구들로부터 맞았던 경험이 있고 당시에 제대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유야무야 묻혀서 억울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던 과거가 있다고 하자.  아마 그 사람은 아이의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겹쳐지며 당시의 억울함에 지배당하게 될 확률이 높다. 과거(자신이 생각하기에) 대처를 잘하지 못했던 자신이 꼴 보기 싫고 자신의 아이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닮았다는 사실에 속상하고, 미안하고, 화나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쳐서 아이에게 왜 맞서 싸우지 않았느냐고 같이 때렸어야 한다고 격앙된 감정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이에게도 사건이 일어나게 한 요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상대 아이가 자신의 아이에게 맞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떠올리기 어렵다. 아이에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 아이를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과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적 요인들은 이미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 다른 한쪽의 부모는 비교적 온건한 분위기에서 학교를 다녔고 친구들과도 별일 없이 잘 지냈으며 문제가 발생했던 순간을 대화로 해결했던 경험이 있고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고 해보자.(직접 폭력을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높은 도덕성을 주입받았다고 한다면) 그럼 이 사람은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관계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할 수도 있다. 아이의 속상함을 읽어주고 어떤 도움을 원하는지 아이에게 물어보고 위로하며 폭력에 대한 관점과 문제해결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한쪽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폭력이 있을 수 있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그런 식의 문제 해결방식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고 맞선다. 서로의 경험이 다른 두 사람이 각자가 옳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분쟁이 발생한다. 아이를 위하는 마음은 두 사람 다 같지만, 각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왜냐면 그래야 자신들의 아이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믿으니까)으로 대응하고자 하기 때문에 상대의 의견을 수용한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은 일이 된다. 오해가 깊어지고 상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아이의 입장은 어떨까? 자신이 꺼낸 이야기 때문에 부모가 다툰다면 아이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아이에게 부모란 우주이며 태양이고 자신의 생존을 좌우하는 절대자이니까 말이다. 아이가 어릴수록 더욱 그렇다. 친구와 다투어서 속상하고 비록 싸우기는 했지만 그 친구만큼 즐겁게 놀 수 있는 친구가 없다면 아이의 고민은 깊어진다. 일방적으로 맞은 것이 아니라 자신도 친구를 때렸다면 더 그럴 것이다. '그냥 다퉜을 뿐인데 걔랑 안 놀면 누구랑 놀아야 하지?' 아이 입장에서는 속상한 마음을 위로받지도 못했고, 부모님끼리 싸우게 만들었으며, 같이 놀 친구도 없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다음에 이와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 아이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 '부모님께 말하지 말아야겠다.'  


아이를 위하는 마음은 컸지만 방향이 달랐기에 부부도 마음이 상하고 아이도 비밀이 생겼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일화를 예로 들었지만 서로가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서 이렇게 부딪히게 되는 일은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친밀감이 높은 관계일수록  더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친밀하다는 것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고 애정이 있다는 것은 상대와 어느 정도 융합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며 융합이 일어나면 더 이상 분리된 객체가 아니기 때문에 나와 같은 한 몸이라는 착각이 일어나는 것 같다설명하고 설득하지 않아도 당연히 상대가 나를 이해할 거라고 믿게 되거나 상대가 나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우리 모두가 겪는 일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40년 넘게 가족 상담을 해오신 국내의 한 교수님께서 가족문제로 찾아온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라고 한 방송에서 하신 이야기다. 왜 우리는 상대를 바꾸려고 하는 가?  내가 아끼는 사람이 나와는 다르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감각을 가지게 하는 걸까? 아마도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멀어지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모습을 보면 '낯설다.' 그 모습을 수용하고 원래 알던 모습에 새로 알게 된 모습을 통합시켜서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리며, 불편하고 힘든 작업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사랑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기다리고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 말이다.


"괜찮아. 네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넌 나의 소중한 사람이야. 언제나 널 응원해. 난 널 믿어."

"널 사랑하니까 내가 이러는 거야! 네가 남이면 내가 이러겠니?"


두 문장에서 온도 차이가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하는 쪽에서는 둘 다 사랑하기에 하는 말이다. 듣는 쪽 입장에서는 어떤가? 하는 쪽 입장과 듣는 쪽 두 입장에 자신을 놓아보자.  차이를 발견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상대에게 원래 의도한 대로 전달이 되는지 안 되는 지를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니까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아끼는 대상이 가장 우리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우리 자신의 풀어지지 않은 불편한 감정들 때문에 등을 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1억 5천만 km,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이다. 태양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이 거리가 정말 마술적인 거리라고 한다. 조금만 더 태양에 가까웠으면 수분이 모두 증발되어 금성과 유사한 환경이 되었을 것이고 조금만 더 태양에서 멀어졌다면 충분한 태양빛을 받지 못해서 지금처럼 생명체로 가득한 지구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적절한 거리가 지켜졌기에 우리는 생명을 누리고 있다. 서로의 인력이 작용하여 튕겨나가지도 끌려들어 가지도 않고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이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거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 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마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일 것이다. 적정한 거리를 지켜주려면 '내가 나로 있어야' 한다. 내가 내 모습을 수용하고, 내 삶을 인정하고, 내 가치를 인정한다면 온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에게 내 모습을 투영하는 일도, 타인을 통해 나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하는 시도도 할 이유가 없다. 삶이 만만하지는 않지만 결국은 다 잘 될 것이라 믿고, 자신이 그러했듯 나 이외의 사람도 그러할 것이기에 걱정을 이유로 타인의 삶에 간섭을 할 필요도 없다. 


내가 여기에 존재하듯 너도 여기에 존재한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가듯 너도 너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여기 있고 너도 여기 있다.

이 시간선 속에 이 공간 속에 너와 나는 존재하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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