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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람 Jun 12. 2024

서두르고 싶지 않아.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 

일터에서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나오는 

발걸음은 느리고 둔하다.

터벅터벅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데

경전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려야 하나? 지금 탈까?'

순간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보통 때라면 이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을 것이다. 

헉헉거리며 계단을 뛰어올라 문이 닫히기 전에 

전철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자리에 털썩 앉아 역시 헉헉 거리면서 숨을 골랐을 것이다. 

놓치지 않고 무사히 차에 올란탄 것에 

묘한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느릿느릿 계단을 걸어 올라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이 글을 쓰는 동안 다음 차가 왔다.

2~3분!

자신에게 느림을 허락한 그 시간 동안 난 평화로웠고 

그 자리에 있었다.

충전이 필요한 나에게 그럴 시간을 주었고

그렇게 나 자신을 돌봤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고

이렇게 온전히 나를 경험하고 있음으로 안온했다.


굳이 타려고 용을 써서 달렸다면 알지 못했을 즐거움이다.

출근길이라면 이런 느긋함은 허용되지 못할 테지만

지금은 퇴근길이고 몇 분 늦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지도 않는다. 

마음이 바빠 늘 조바심 내며 다녔었던 나에게

이 순간 느림을 허락한 내가 고맙다.




시간에 대한 감각은 다 다른 것 같다. 

상황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껴지고 말이다. 

지루한 수업시간은 끝이 없는 것 처럼 느껴져 

'아직 10분밖에 안 지났다고?' 라며 현실을 부정을 하게 만들고

콘서트장에서의 2시간은 '벌써 끝이야?'라며 현실을 부정하게 만든다. 


1년 12달 24시간은 생활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모두의 약속일 뿐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그렇게 정해놓아야 사람들이 움직이는데 편리할 테니까.

외부세계의 시간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 맞다. 

혼란을 주어서는 곤란하니까 말이다. 


그럼 개인의 내부세계에서 시간은 어떤가?

앞서 말한 수업시간과 콘서트장의 시간처럼 

시간으 흐름은 다르게 느껴진다. 

그렇다는 것은 개인이 마음먹기 따라 

시간에 대한 개념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음이 가있고 의식이 머무는 곳에서의 시간은 

의미 있는 것이어서 가치롭게 느껴지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스스로 시간을 알차게 잘 쓰는 사람'으로 

자신을 지각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시간을 자유롭게 잘 쓰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반면에 외부세계의 기준에 맞추어서 해야 할 일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어떨까?

께어있는 모든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시간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은 어떻게 지각될까?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일이기에 많은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개인적으로 의미가 적은 일을 하고 있다면 

어쩌면 '시간 안에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 

혹은 '늘 빠듯한 시간 때문에 쫓기는 사람'으로 자신을 지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산업화된 사회에서 시간에 대한 압박 없이 살아가기는 어려울테지만 

하지만 그 압박을 상황에 따라, 때에 따라 조절하면서 살 수는 있지 않을까?

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고무줄은 그것을 놓아도 원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복원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계속해서 당겨져 있으면 끊어지고 만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적당히 당겼다가 놓고 또 적당히 당겼다가 놓고 

영원히 사용할 수는 없지만 복원력과 내구성을 좀 더 오래 유지할 수는 있다. 


긴 인생이다. 

가능한 현재의 기능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면서 살아내려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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