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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람 Jul 07. 2024

말의 힘

입에서 독이 나오는 때가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내뿜는 독에 상대는 서서히 시들어 간다. 상대의 모습이 자신 때문이라는 자각이 일면 좋으련만 의도하지 않은 일이기에 상대가 자신 때문에 시들어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때문에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상대를 끌어안지 못한다. 그저 상대의 나약함을 탓할 뿐이다.  


입에서 불이 나오는 때가 있다. 자신이 불을 내뿜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상대에게 옮겨간 불이 화르륵 타오르며 상대도 불을 뿜어 낼 때 그것이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상대의 불에 맞서기 위해 더 큰 불기운을 끌어올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을 뿜어대다 결국 서로를 태워버릴 뿐이다.


입에서 가시가 나오는 때가 있다. 모르는 사이 날아간 가시는 상대의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 상처 입은 가슴을 가진 상대도 거칠어져 똑같이 가시를 뱉어낸다. 둘 다 상처 입거나 어느 한쪽이 숨어버리거나 가시를 막을 방패를 내세우거나 서로 적이 되어 서로를 찌를 뿐이다. 


비난하고, 욕하고, 깍아내리고, 몰아세우고......


입에서 꽃이 나오는 때가 있다. 화사하고 선명한 색과 하늘거리는 꽃잎이 사뿐히 상대에게 내려앉는다. 꽃들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상대는 마음이 열리고 평온함과 따스함 속에서  안심하고 안정되고 행복하다. 


입에서 향기가 나오는 때가 있다. 은은한 향기는 가만가만 퍼져나가 상대를 불러들인다. 이리와 달라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끌려 온다. 향긋한 향기는 상대를 감싸 안고 즐겁고 유쾌함 속에 기쁨을 느끼게 한다. 


입에서 빛이 나오는 때가 있다. 환하게 주위를 밝혀주는 빛은 상대를 비춰주어 밝게 빛나게 한다. 상대의 빛은 자신도 밝혀주어 서로 밝음 속에서 자유롭고 온전하며 생기 가득하다. 


인정하고, 수용하고, 격려하고, 이해하고, 믿고, 기다려주고......




우리는,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많은 사례에서 보듯이 이성적이지도 않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맞으나 감정에 휩싸여 그 기능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더 많아 보인다. 그래서 때로 생각지도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 상처를 입기도 한다. 자신은 정당하다고 믿으며 상대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하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으로서 품위는 내려놓게 된다(오해 없으시길 범죄자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가 아니다. 일상에서 얼굴을 맞대고 함께 살아가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상대를 굴복시켜야지. 보이지 않는 총과 칼이 난무한다. 공격을 받은 상대도 생존본능에 따라 반격하게 되고 순간의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대가는 두고두고 치르게 된다. 그럴 가치가 있는가? 적어도 곁을 지키는 가족들과 친우들에게만큼은 조금 더 여유로워지면 어떨까? 상대를 조금만 더 믿어주고 이해해보려 하고 내 생각이 상대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해 본다면 아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켜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세상에서 내 존재를 드러내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성장해 나가기 위해 '내가 옳다'는 믿음은 필요하다. 도전을 받아들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어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유연할 필요도 있다. 상대도 똑같이 '내가 옳다'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있을 텐데 상대와 내가 부딪히는 부분에서 어떻게 타협점을 찾을 것이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애초에 우리의 신념이라는 것은 살아오면서 자신이 경험하고 해석한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세상의 모든 경우와 사람을 경험한 것이 아니기에 오류도 있고 편향도 있다. 따라서 자신에게는 정당한 것이 타인에게는 그만큼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못할 수 있다.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넌 어떻게 생각이 그러냐?"

"와, 말도 안 돼. 그걸 그렇게 생각한다고?" 


맞다.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왜냐면 낯서니까. 자신이 경험해 온 세상과는 다른 경험을 해온 상대가 가지고 있는 태도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상대의 삶을 살아본 것이 아니기에 쉽게 "네가 틀렸어."라고 하기보다는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정도로 반응해 주는 것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일 수 있다. 상대와의 관계가 소중하다면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평생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상대와 자신은 다른 경험과 능력, 기질을 가진 다른 존재이다.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 해결하는 방식, 그 속에서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 등 많은 것들이 다르다. 그러니 어렵고 힘든 이해보다 그냥 다름을 인정하는 것 정도에서 타협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단, '내가 너의 방식을 인정하고 너도 나의 방식을 인정'하는 룰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근원에는 상호성이 있으니 말이다. 배려도 존중도 공감과 이해도 상호적이어야 한다. 기울어진 관계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은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니 상대에게 기회를 주고 싶을 수도 있다. 많이 노력했지만 변화가 없어 상대와의 관계를 끝내고 싶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할지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 가능성이 있고 기회를 주고 싶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있잖아.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을 선호하고 더 편해한다는 것은 알겠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네 뜻대로 하는 것을 인정할 게. 그런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견디기가 좀 힘드네. 이렇게 해주면 함께 지내는데 도움이 될 거 같아. 난 너와 잘 지내고 싶어." 


 적당히 겹쳐지는 교집합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고 자율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절친, 연인, 가족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교집합과 독립된 부분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지지한다면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친 관여는 필연적으로 희생과 보답받지 못해 괴로운 마음을 만들어 내고 마음의 평화를 해친다. 상대 역시 고마움보다는 간섭받고 존중받지 못하고 소통이 안된다는 느낌으로 관계를 포기하려고 할 수 있다. 붙잡을수록 멀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마음의 평화가 깨진 상태에서는 상냥하고 배려 넘치며 상대를 존중하는 말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참을성은 그렇게 위대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신의 입에서 무엇이 나오기를 바라는지 말이다.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매 순간 선택이다. 독과 불, 가시로 관계를 망칠지 꽃과 향기, 빛으로 관계를 성장시켜 나갈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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