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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람 Jul 03. 2024

우리가 떠나온 것들

아침에 일어나 미닫이 문을 열고 축담에 내려서면 청명한 공기와 환한 햇살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면 마당 한 쪽면에 꽃밭이 있었고 바람을 타고 씨앗이 날아와 심지도 않은 예쁜 꽃들이 피곤했다. 보루쿠(시멘트 벽돌)로 만들어진 꽃밭의 경계에는 채송화들이 심겨 여름의 꽃밭을 화사하게 만들어주곤 했다. 백합, 국화, 나리꽃, 족두리꽃, 방아풀, 개망초, 민들레, 철쭉, 군자란, 난이 계절을 바꿔가며 색색의 꽃을 피워냈다. 한편에 든직하니 자리 잡은 무화과나무는 해마다 맛난 열매를 선사해 주었다.


꽃밭은 맞은편에는 평상이 놓여있었다.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언제 만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평상은 강아지들의 침대였고 놀이터였으며 밤에는 별을 보는 곳이었다. 평상에 누우면 하늘 가득 펼쳐진 별들이 눈에 들어왔고 한참을 보고 있어도 좋았다. 강아지들이 다른 집으로 떠난 뒤에는 고양이가 평상의 주인이 되었다. 오르락내리락 점프하기도 하고 도도도도 달려 나가 풀쩍 뛰어내리기도 했다. 손님들이 오시면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가셨고 시원한 냉수 한 잔은 대접하셨던 것 같다. 


정지(부엌)로 들어가는 길 앞에는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장독대가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인 장독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우리 집 음식의 맛을 책임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장독대가 있던 곳에는 창고가 생겼고 장독은 창고 위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가서 보는 경치는 또 달랐다. 주위에 그렇게 큰 건물들이 없던 시절이어서 집들 사이로 제법 멀리까지 보였었다.

 

정지(부엌)엔 나무를 때는 아궁이가 있었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와 불빛이 좋았는데 어머니는 근처에  못 오게 하셨던 것 같다. 매캐한 연기도 연기지만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염려하셨던 건 아닐까 싶다. 어느 날인가 아궁이는 막아졌고 대신 연탄이 들어왔다. 연탄을 시간 맞춰 갈지 않으면 불이 꺼져 냉골이 되기에 연탄 가는 시간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한밤중에 깨서 연탄을 갈고 싶지 않다면 연탄을 가는 시간을 잘 맞추어야 했다. 보통 저녁 무렵에 갈았는데 한동안 내가 당번이 되었었다. 아래에 있는 다 탄 연탄을 꺼내고 위에 있던 연탄을 넣고 새 연탄을 넣는다. 이때 구멍을 잘 맞춰주어야 불이 잘 붙는다. 제대로 맞추지 않았다가는 연탄이 꺼져 버리니까. 또 연탄끼리 붙지 않게 하려고 소금을 꼭 뿌리셨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집 뒤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었다. 길 아래로 축대가 높게 쌓여있었는데 걸어가다 보면 축대가 낮아져서 개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친구들과 개울 속의 돌들을 밟으며 물속에 뭐가 있나 살펴보았던 기억이 난다. 등교하는 길, 길 따라 흘러가던 개울은 중간쯤부터는 방향이 갈라져서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그쪽은 길이 없어서 '이 개울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개울 바로 옆에는 큰 공터가 있어서 동네아이들이 놀이터 노릇을 톡톡히 했다. 제법 큰 나무도 거기에 있었는데 더위를 식히기에 아주 좋았다. 숨바꼭질할 때 술래가 머무르는 공간이 되어주었고, 공기놀이를 할 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곳에 가면 놀고 있는 아이들이 늘 2~3명은 있었던 것 같다. 넓은 공간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였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다니며 비석치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잡기놀이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때의 골목은 거의 맨땅이었고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이었다. 집 앞에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었는데 옛날 돌을 캐던 광산이라 곱돌(각섬석) 조각이 많았다. 이 곱돌조각을 바닥에 대고 그으면 분필처럼 색이 묻어나서 그림도 그리고 사방치기 할 때 선도 그었다. 곱돌조각도 더 잘 그려지는 것이 있었기에 어떻게 생긴 것이 더 잘 그려지는지 꼬맹이들끼리 분석(?) 회의도 열렸었다. 초등 고학년쯤 되어서는 친구 따라 쑥캐러 간다고 제법 멀리까지 걸어가서 바람 부는 언덕에서 잘 생긴 쑥을 찾느라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아래서 위까지 훑으며 다니기도 했었다. 깔끔하게 채취하지 못해서 일거리 늘린다고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랑 같이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데 잔소리야 뭐..... 장난감은 없었지만 놀거리도, 놀공간도 넘쳐났었다. 


방과후 학교 운동장은 아이들로 늘 북적였다. 해가 떠있는 동안은 놀아야지! 넓은 운동장에는 자전거가 다니지도 차가 다니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공간이었고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각자의 구역을 만들어 놀았다. 운동장도 넓었으니 아이들 수십 명쯤이야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안경, 오징어, 고무줄놀이, 오자미 던지기(콩주머니 던지기), 단단 뛰기(술레가 허리를 굽혀 발목을 잡고 있으면 등을 짚고 그 위를 넘는 놀이) 등등. 여기저기서 아웃이네 아니네. 금을 밟았네 아니네. 투닥이는 소리가 들리고 다투기도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언제나 그 자리에 그 아이들이 다시 나와서 놀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 인근에 있는 강으로 놀러 갔었다. 가끔은 삶은 감자나 옥수수, 미숫가루 등 간식거리를 챙겨서 가기도 했다.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그고 다슬기를 찾느라 이 돌 저돌 뒤집고 다니다 보면 송사리가 다리사이를 슬쩍슬쩍 스치고 지나고 물살이 다리를 간지럽히곤 했다. 누가 더 많이 잡았는지 소쿠리 속을 들여다보며 내게(것) 더 큰 놈들이 많네 네게(것) 더 큰 놈들이 많네 하며 서로 다슬기 잡는 솜씨를 자랑하기도 했다. 


집에는 가끔 누군가가 오셔서 떡을 주고 가시거나 음식들을 주고 가셨다. 접시에 담겨 모락모락 김이 나는 시루떡이 올 때도 있었고 소쿠리에 전, 생선, 과일, 탕국이 담겨 올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분들을 붙잡고 고맙다고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보내드렸다. 그리곤 어디 어디에 어떤 사람들이 이사 왔단다. 어느 집에서 어제 제사를 지냈단다하고 그 음식들의 출처를 말씀해 주셨다. 어떤 때는 맛난 음식을 했으니 나눠 먹자고 들고 오시는 분들도 있으셨다. 갈비찜, 떡, 잡채, 식혜 등등 만드는 수고로움과 나눠먹는 넉넉함을 모른 채 어린 마음에 마냥 맛난 음식이 생겨서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봄에 진달래 꽃을 따다가 찹쌀반죽과 함께 참기름으로 고소하게 구워내주시던 화전이 기억난다. 꽃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예뻐서 가만히 들여다보았었다. 수돗물도 시원하게 그냥 마실 수 있었고 시골에 가면 볼 수 있던 펌프는 냉기마저 감돌아서 펌프로 길어낸 물에 수박을 담가놓고 시원하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다 따라간 약수터의 물도 달고 시원했었다. 해마다 문의 한지를 벗겨내고 다시 발랐는데 밀가루가 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국화잎을 손잡이 부근에 넣으셔서 멋을 내셨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록빛은 점차 갈색빛으로 바뀌었고 그 변화마저 신기하게 여겨졌었다. 정확히는 썩지 않고 국화잎모양 그대로 있는 것이 신기했던 것 같다. 문을 떼어 마당에다 걸쳐 놓고 물을 뿌려 한지를 벗겨내고 새 한지에 정성껏 풀을 발라 잘 펴 바르는 일은 온 가족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풀칠을 거들거나 한지 끝을 잡아드리거나 하는 것뿐이었지만 집안일에 나도 한 손을 보탰다는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자라던 시절과 지금의 시절은 많이 다르다. 웬만큼 적응하며 살아왔다 싶은데 요즘은 변화의 속도가 더 빨라져서 그런지 예전만큼 적응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문풍지 하나로 추위를 막아내고 한여름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이겨내던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 시절의 느린 삶이 그리워진 모양이다.


  우리의 뇌는 선사시대의 인류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이 빠른 변화를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너무 빨리 뭔가를 해야 할 때는 주위를 둘러볼 사이가 없다. 그래서 친밀한 관계에 무슨 일이 생겨나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는 무슨 일이 생겨나고 있는지 모르고 지낸다. 의식의 속도가 행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가 드러나게 되면 그때는 많은 것들을 놓친 다음이거나 소진된 다음이 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모두가 빠른 삶에 적응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모두가 빠른 삶에 적응이 쉬운 것도 아니다. 각자 자신의 속도에 맞는 삶을 살고 그것을 개인이 알아서 하도록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면 현대사회의 스트레스가 줄어들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보여주기 위해 내달리는 성과지향보다 내실을 다지는 성과지향으로 조금만 움직여본다면 인간소외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더 충실하고 만족하면서 살수 있지않을까......   




[사진출처] 

낙안읍성: 낙안읍성 (sun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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