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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람 May 27. 2024

몸과 마음은 하나다

- 몸이 보내는 신호는 마음의 신호이기도 하다

혹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아플 때 진통제를 먹으면

실제로 통증이 줄어든다는 이야기 말이다.

육체적 통증이든 마음의 통증이든

에서 지각되는 부위는 다고 한다.


과로로 지치거나,

힘든 사건을 겪거나,

아프거나 몸을 다쳤을 때,

물리적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충격으로 기절하기도 하고,

병이 오래가면 마음의 힘도 빠진다.


연인과 헤어지거나

이혼하거나

친한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가거나

반려동물이 떠나가거나

가족을 잃거나

마음이 힘들어지는 일이 생기면

몸도 아파진다.


마음이 힘들어서 찾아오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는 식의 반응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혼자 담아두고 있다가 상황이 악화되고

그때부터는 스스로도 자신이 나약해서 그렇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듯하다.

마음의 힘듦을 나약함으로 여기고 있는 듯 보인다.


사람의 마음이란 다채로움 그 자체이다.

한없이 약해 보이다가도 한없이 강해 보이기도 한다.

정말 사소한 것에 제약이 걸려서 힘들어지기도 하고

정말 사소한 것에서 도움을 받아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도 한다.

같은 일을 겪어도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유사한 패턴은 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다.

개개인의 성격이 비슷한 듯 다르듯이

개개인의 마음도 비슷한 듯 다르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수많은 이론들이 정립되었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완벽하게 사람의 마음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왜냐고?

우주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천체물리학이란 학문이 있고

우주의 많은 부분을 밝혀냈지만

그만큼 모르는 부분도 많아졌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우리의 뇌는 절전모드를 선호한다고 한다.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뇌가 쓰는 에너지가 다른 신체기관에 비해 많기에 인류는 뇌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쪽으로 진화했다.

선입견, 편견, 습관, 가치관....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매번 새롭게 분석하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든다.

그래서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하나로 묶고

'이런 거야'라고 판단을 내린 것은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익숙해지면 생각하지 않고 자동화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렇게 긴 세월 인류는 살아남았다.

애쓰지 않으면 자신의 틀에 갇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를 무수히 경험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실패의 경험이 더 클 수도 있다.

좌절은 꽤나 아픈 것이어서 회복하는데 제법 오랜 시간과 많은 자원이 요구될 수 있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는,

너무 바쁜 것 같다.

스스로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보다

어서 회복하라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다그치는 듯하다.

표면상으로는 걱정이 맞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답답하고 속상하고 서럽고 롭다.


이건 마치 전투를 치르고 부상을 입을 부상병에게

다 낫기도 전에 전투에 다시 뛰어들라고 하는 것 같다.

전투를 빨리 끝내야

평화롭게 다시 일상을 유지할 수 있으니

지금 아픈 건 무시하라고 말이다.

맞는 말인 것 같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질문을 해보자.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이 병사는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까?

낫지 않는 몸으로 전투에 다시 나서는 것이

정말로 이 병사를 위한 일이 맞는가?


쉬지 않고 일만 하면 소진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계속 일한다면 육신이 스러지겠지.

마음이라고 다를까.


마음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있고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마음 상태가  변화한다고 생각해 보자

에너지가 공급되면 우리는 잘 기능한다.

여유롭고 너그러우며 상냥하고 친절해질 수 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좋은 면을 찾아내

인내하고 결과를 맺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삶은 의미 있는 것이 되고

좌절이나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와도

충분히 아파하고 그만큼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에너지가 공급이 되지 않거나

소모되는 에너지가 더 크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기능이 삐거덕 거리기 시작한다.

여유는 사라지고 압박감은 커진다.

위축되고  물러나고 암울해진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고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는 사라져 간다.

관성에 의해 습관처럼 움직인다.

그럼에도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버거워지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더 혼란스럽기만 하다.


마음이 힘들어졌다면

나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픈 가족을 간호하듯

먹고, 잠자고, 적당히 움직이게 하고

혼자두지 말고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경험들을 하도록 말이다.


너무 열심히 쉬지 않고 달려왔을 수 있다.

스스로 세운 목표가 너무 이상적일 수 있다.

조급하게 굴고 있거나, 

성취압력이 너무 높거나,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너무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거나,

너무 많은 것을 해내려 하거나,

해내도록 요구받고 있거나,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을 수도 있다.


잘하려고 애쓰다 소진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마음이 약해서 그렇다는 반응만큼은 하지 말아 보자.

최소한 많이 힘들었구나 정도의 말은 전해줘 보자.

비록 당신의 눈에는 별일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따끔한 충고를 해주고 싶더라도 말이다.

각자가 지각하는 삶의 무게가 결코 같을 수는 없다.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로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고난의 크기를 비교하지 말고

고난을 겪으니 힘들겠다는 현실에 동의하면 될 일이다.


쉽게 지치고 기운이 빠지고,

아침에 잠에서 깨기가 너무 어렵고,

어지럽고, 멍하고, 어깨는 무겁고,

짜증이 자주 나고,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밤에 잘 때 내일이 오는 것이 부담스럽다.

만약 당신이 이렇다면

잘 먹고 푹 쉬고 주기적으로 산책이라도 나가보자.

하루에 10분이라도 좋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자

그곳에서 그 시간에서 어떤 것도 하지 말고

그저 휴식을 누려보자.

브레이크 타임이다.


어쩌면 그 순간 마음과 몸이 하나임을 느끼고

비로소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로 있을 때 가장 충만한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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