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초입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일을 마치고 늦은 오후 정류장에 나왔다.
주말 오후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북적이고 있었다.
타야 할 버스가 20분 남짓 남은 것을 확인하고 뭐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 인생 너무 힘들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앳된 목소리와 말의 내용이 만들어내는 부조화에 웃음이 났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했다. 뒤를 돌아보니 초등학교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셋이 지친듯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시선이 갔다.
마침 아이들 옆에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서 계셨는데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인생이 힘들어? 무슨 일로 힘드는데?"라며 물으셨다.
말을 했던 아이는 어르신이 계신 것을 보고 놀란 듯
(아마 적절하지 않은 발언을 했다 싶었나 보다) 움찔했었는데 어르신께서 편안하게 말을 걸어오시자 안심이 되었는지
"저희 가요 타야 되는 버스가 있는데 가버렸어요. 더운데 30분을 기다려야 해요."
라고 답했다. 목소리에는 속상함과 아득함, 상황에 대한 투덜거림이 묻어났다.
9월 중순이지만 낮기온은 계속 30도 이상이었고 늦은 오후 달궈진 아스팔트 열기까지 더해져서
그늘이 있으나 정류장이라고 시원하지는 않았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으흠, 힘들만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께서도 같은 생각이셨는지 아이에게 다시 말을 거셨다.
"어디까지 가는데?"
아이는 자신들의 목적지를 이야기했고 어르신은 도움을 주고 싶으셨는지 다른 버스를 타면 몇 분만 기다리면 탈 수 있고 대신에 10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고 정보를 주셨다. 아이들은 더 걷고 싶지 않다면서 그냥 기다리겠다고 답했다.
덥다고 연신 손부채를 하고 있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바로 옆 스마트 정류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들어갔다가 환해진 얼굴로 친구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좀 전까지 축 처져있던 모습이 언제였냐는듯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에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신나 했다. 어르신도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미소를 띤 채 바라보셨다.
아이들이 주고받던 말들에 따르면 주말이라 시내에서 약속을 잡았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돌아다녔던 모양이었다. 더운 날씨에 사람 많은 시내를 돌아다니다 덥기도 덥고 지치기도 해서 이제 집 가자 했을 텐데 버스는 가버리고 많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허탈했을 것이다. 짜증도 났을 테고 말이다. 그렇지만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금세 행복해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께서 초등학생 어린아이가 하는 철없는 이야기로 넘겨버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이야기를 건네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나이로 구분 짓지 않고 그 순간 아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아이의 입장을 수긍해 주셨다.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해보라는 대로 하라고 강조하지 않으셔서 좋았다. 당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전달을 하였으나 아이들이 선택하지 않는 것에 어떠한 불쾌감도 표현하지 않으셨다. 그냥 미소 지으시며 그렇구나 하셨다. 넉넉한 마음이 따스하게 다가왔다.
덥고 습한 늦은 오후가 왠지 청량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