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나가던 무렵의 저녁이었다.
둘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불렀다.
평소 시크한 매력을 뿜어내는 편인데
뭔가 부탁을 할 때는 귀여움이 스멀스멀 풍겨 나온다.
물론 본인은 자각이 없겠지만 말이다.
욘석이 뭔가 부탁할 게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왜?" 하고 답을 했다.
둘째 : 있잖아 나랑 언니 둘 다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가
재개봉하거든
나: 응
둘째: 근데 영화관이 엄마 일하는 곳 근처야. 영화가
마치는 시간도 엄마 퇴근 시간이랑 비슷해.
나: 응, 그래서
둘째 : 그래서 영화 다 보고 엄마 쪽으로 가서 같이
집 오는 거 어떻게 생각해?
나: 괜찮다고 생각해.
둘째: 그지? 괜찮지?
환하게 표정이 밝아지는 둘째를 보고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게 뭐라고 조심하며 이야기하는지. 혹시나 엄마가 다른 일이 있어서 안된다고 할까 봐 염려했던 걸까?
늦은 저녁시간이니 만나면 근처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자고 제안했고 둘은 좋아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스타일인 첫째는 혹시 문 닫는 식당들이 있을 수 있다고 주변 식당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무얼 먹을지 의논하다 적당한 식당을 고르고는 내일 저녁에 보자 하고 마무리 지었다.
다음날 예정보다 20분 정도 일이 빨리 끝났다. 애들에게 전화를 해보니 막 영화가 끝났다고 했다. 영화가 재밌었는지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벌써 마쳤냐고 엄마 기다려야 하는데 어쩌냐고 첫째가 염려 아닌 염려를 한다. 괜찮으니 편히 오라고 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아이들의 모습이 길건너로 보였다. 나를 발견하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신호등 불이 바뀌고 빠른 걸음으로 나를 향해 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릴 때 쪼르르 달려오던 모습과 겹쳐진다.
'여전히 엄마를 좋아해 줘서 고맙구나 얘들아.'
영화이야기를 조잘조잘 나누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둘은 계속 영화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이 나오고 "맛있다"하며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는데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 얘들은 일하는 엄마를 보러 오는구나.'
나와는 경험이 다를 터이다. 우리 세대의 어머니들은 전업주부가 많으셨다. 남편이 벌어오는 수입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당연히 여겨지던 시대를 살아오셨다.
이 아이들에게 '일하는 엄마'는 어떤 의미로 그려질까? 자신들의 삶 속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궁금했지만 질문은 좀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그에 대한 답은 좀 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식사를 끝내고 버스에 올랐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버스 안에는 7080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로 버스 안의 조명도 낮춰주셨다. 은은한 불빛아래 추억의 음악들이 흐르고 옆에는 소중한 이들이 있었다. 행복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른다. 그래, 지금 이 순간 행복하구나.
혼자 가는 일상의 퇴근길에 이렇게 이벤트가 생겨났다.
엄마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퇴근길 선물해 준 얘들아, 고마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