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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근주 Oct 17. 2024

상실된 사람들

2. 꿈(1)

 해가 기울면서 얼굴을 덮는 햇빛에 눈을 잔뜩 찌푸렸다.


 "일어났어?"


 나무 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보던 그가 말했다. 그의 옆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잠시 시린 눈을 진정시키려 눈을 감았던 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책갈피로 사용하는 천을 읽던 페이지 사이에 끼우고 책을 덮었다. 검은 구름 사이로 무지개 빛 하늘이 보이고 그 사이로 반짝이는 점들이 쏟아지는 사진의 표지 위로 '코스모스'라는 반쯤 벗겨진 글자가 새겨진 책이었다. 종이를 생산할 수 없는 시대가 오면서 책은 아주 귀한 물건이 되었다. 이 마을에도 책은 몇 권 남지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그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이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면 늘 이 책을 꺼내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끝이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끝까지. 내가 본 것만 해도 그는 열 번을 이미 완독 했고 열한 번째 재독을 하는 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한데 왜 계속 읽는 거야?"


 내 질문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에 나온 이야기들이 진실들이었다는 걸 믿어줄 사람은 계속 존재해야 하니까."


 그는 내게 늘 진실만을 알려주려고 노력했지만, 이 책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꾸며낸 이야기가 분명했다. 당장 하늘도 날지 못하는데 어떻게 저 멀리 빛나는 별들 사이를 여행하는 걸 꿈꾸었는지. 그럼에도 그가 책 이야기를 해줄 때면 나는 흥미롭게 듣곤 했다.

 그는 마을의 의사였다. 한 명밖에 없는 의사. 그래서 늘 바빴다. 아침 일찍 약이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나가면 해가 지고 나서야 돌아왔다. 오늘처럼 낮에 함께하는 날은 일주일에 일요일, 딱 하루뿐이었다. 왕진이 없는 날엔 돌아오는 날에 사용할 약재를 구하러 다니거나 지금처럼 책을 읽거나 혹은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먼 옛날엔 말이지.'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먼 옛날엔 말이지."


 잠에서 깬 내가 심심해하며 의자를 뒤로 까딱거리자 그가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했던 때가 있었어."


 그가 이번에 꺼낸 이야기는 화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는 보통 책을 읽고 있는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먼 옛날의 사람들은 지구를 벗어나 화성에서도 살고 싶어 했다. 그곳은 지구와 비슷한 크기에 지구보다 조금 더 추운 곳이었다. 그곳의 기상은 지구보다 척박했지만, 점차 망가져가는 지구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성행을 희망한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이주 계획보다 지구 환경 시스템의 붕괴가 먼저 찾아왔다. 모든 것이 메말라버리고, 지구를 벗어난 다음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로 시작하든 여러 상황들이 맞물려 지금의 사막들이 생겨났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진짜 나무와 풀과 꽃이 가득한 세상이 존재했었어?"


 이야기는 나의 이 질문으로 마무리되었다.


 "지금도 있는 걸. 북동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과거로 통하는 터널이 있어. 거길 통과하면 자연으로 가득한 곳으로 가게 될 거야."

 "거짓말."


 나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대문을 열고 남자 한 명이 들어왔다. 두 집 건너 늙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밀로 아저씨였다. 급히 뛰어왔는지 창백한 얼굴에 숨을 헐떡였다.


 "준, 할머니가 이상해!"


 그는 책을 의자에 올려두고 서둘러 약가방을 챙겨 나갔다. 갑작스러운 증상 악화로 그를 찾는 사람이 불쑥 방문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른 날 같았으면 그가 다녀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었을 건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그를 따라나서고 싶었다. 밀로를 따라 뛰어나가는 준을 뒤따랐다.


 "넌 여기 있는 게 좋겠어.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테니까."


 그가 대문을 나서려는 나를 제지했다. 나는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준은 멀어지는 밀로를 보며 더는 말릴 시간이 없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쳐다봤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것들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무언의 전달이었다. 나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을 따라 밀로의 집에 들어갔을 때 코를 찌르는 시큼한 땀냄새가 확 풍겼다. 나는 구역질이 올라와 등을 돌렸다. 준은 냄새에 아랑곳하지 않고 밀로의 할머니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준의 바쁘게 밀로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 지시에 따라 밀로가 주방을 바삐 오갔다. 물과 컵을 가져갈 때도 있었고 물수건을 가져갈 때도 있었다.

 냄새에 차츰 적응되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호흡이 안정된 할머니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옆에 밀로와 준이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막모래병인데 콧물에 뭉친 모래 덩어리가 기도를 막았나 봐. 다행히 목까지 넘어간 건 아니어서 쉽게 제거할 수 있었어."

 "할머니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정말 고마워!"


 밀로가 준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감사해했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아 감사를 받는 것까지 나는 순간 준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돌아가는 길에 준이 나를 데려가지 않으려고 차갑게 말했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 당시의 다급함, 장소가 주는 압박감은 그가 나를 데려가지 않으려 했던 마음을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준."


 내가 그를 불렀다. 두 발짝 정도 앞서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나, 준처럼 의사가 되고 싶어."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걱정과 불안, 염려 그리고 올 것이 왔다는 체념이 섞인 눈빛이었다.


 "쉬운 길은 아닐 거야."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준이 평소처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힘껏 잡았다. 그의 손은 사막에서도 기분 좋을 만큼 적당히 따듯했다.




 준을 따라다니며 환자를 돌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 찰과상이나 감기부터 중증까지 병세는 다양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나는 마을에 이토록 환자가 많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늘 마주하던 사람들은 그들이 건강했기에 마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아픈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었다.

 약만 처방해 주면 끝날 일을 늦은 시간까지 하고 온다고 짜증을 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웠다. 그는 환자와 마주해 귀 기울여 듣고 상담해 주었고, 약 사용법과 치료 중에 지켜야 할 것들을 꼼꼼히 알려주었다. 한 명 한 명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곁에서 지켜보는 내게도 확실히 전해졌다.

그가 오늘 돌아야 할 곳을 모두 돌고 나면 해는 지평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마을을 빙 둘러 걸으며 약으로 쓸만한 것들을 채취했다. 길 구석에 아무렇게나 난 잡초인 줄 알았는데 감초였거나, 대체 왜 있는지 모르는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유향나무였다. 준은 그것들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만큼만 채취했다.

 그리고 집에 오면 그것을 약재로 쓸 수 있게끔 잘 정제했다. 그는 잠을 자는 시간과 내게 할애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의사라는 책무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내가 봤을 때 준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자신의 일에 빠져 있는 것 같아."


 돌그릇에 말려 놓은 약초를 빻고 있는 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글쎄. 내가 의사니까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모두를 살리겠다는 거창한 소명의식이나 의료 행위로 남들보다 더 혜택을 받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야."


 그가 약재 냄새가 밴 손으로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부품 하나가 고장 나면 전체가 삐걱거리듯이, 누구 하나가 불만을 품기 시작하면 마을에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어. 마을 사람들 모두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란다. 네가 보기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일하는 것 같지만, 그건 네가 내 옆에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봐서 그런 거야."


 그는 가루가 된 약재를 주머니에 옮겨 담은 뒤 팔을 쭉 뻗어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 찌뿌둥해진 몸을 이완시켰다. 다음날 쓸 약재 준비가 끝나면 곧바로 취침시간이었다. 뒷정리를 돕다 밤하늘을 보면서 예전에 그가 들려준 이야기 중 한 부분이 생각났다.


 "옛날에 도시라고 불린 곳에서는 지상이 지금의 밤하늘보다 훨씬 밝았었어."


 새카만 밤하늘은 반짝이는 모래를 뿌려놓은 것처럼 별들로 가득했다. 툭 건드리면 저 수많은 반짝이는 것들이 지상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온 마을이 촛불을 켜도 밤하늘보다 밝을 것 같진 않았다. 그는 내가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놀리려 거짓말을 한 게 분명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 속을 만큼 어리지도 순진하지도 않은 나이라는 것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의 이야기는 나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늘 거짓을 섞었고,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늘 놀라워한다. 이것은 나만 아는 우리 둘 사이를 이어주는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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