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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숙면하지 못한 후유증이 업무 시간 내내 나타났다. 또 한 번의 실수. 점심시간에 누누로부터 걸려 온 전화 너머로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다. 구구는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을 유지하던 어떤 규칙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하루 전체가 일그러졌다.
퇴근길 하늘은 어제보다 아주 조금 일찍 어두워졌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구구는 어제처럼 반찬가게가 있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여전히 조명가게가 자리하고 있다. 구구는 아침을 먹다가 반찬이 담긴 용기에 붙어 있던 스티커를 주머니에 챙겨 온 것을 떠올리고, 그것을 꺼내 옆집 과일 가게로 들어갔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과일가게 주인이 건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혹시 이 가게를 아시는가 싶어 들렸습니다."
구구가 반찬가게 이름이 잘 보이도록 스티커를 내밀었다. 과일가게 주인은 건성으로 훑어보더니 생전 처음 보는 가게라고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여기 시장에 반찬가게라고는 입구에 있는 가게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 그만 귀찮게 구시고 돌아가세요."
과일가게 주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구구는 시장 입구로 나와 하나밖에 없다는 반찬가게 앞에 섰다. 구구가 쥐고 있던 곳과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확실하게, 이곳은 구구가 이용하던 가게가 아니었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며 보기 위해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흔히 이 시간대에 방송되는 지역 소개 교양 프로그램이 송출되고 있었다. 바다에서 갓 건진 생선의 에너지를 보여주고, 그 생선을 이용해 요리하는 식당을 소개하고, 이 생선이 이곳의 특산물이라서 더 맛있다는 뻔한 레퍼토리였다. 다른 채널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여러 패널들이 나와 검증되지 않은 의학 정보를 알려주거나, 드물게 외국의 관광지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섞여 있었다. 어느 채널에서도 외계인 침공이나 그 이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구구는 그 이슈에 집중하는 자신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소식은 확실하게 구구에게 전달되었고, 확실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 아닌가요.
실제로도 세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반찬가게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마치 존재했던 것처럼 믿기 위해 스스로 꾸며낸 일일까. 그랬다면 무엇 때문에 구구 자신이 자신을 속이려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 확률이 희박한 가능성까지 생각을 뻗어보지만 결국 하나의 결론에 맞닥뜨렸다. 나는 실제로 그 상황을 겪은 것이 분명하다.
식사를 마치고 평소대로 목욕을 마쳤다. 목욕 가운을 하반신에 걸치고 나오니 구구의 집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루루인가 싶었는데 평소 자주 듣던 부츠의 높고 뾰족한 굽에서 나는 날카로운 울림이 아니었다. 넓고 납작한 구두 굽의 낮고 무겁고 탁한 울림이었다.
구두 소리의 주인공은 정확하게 두 번 끊어 노크했다. 똑- 똑-, 두드리는 소리의 정확성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구구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 밖에는 밝은 남색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적당히 근육이 붙은 몸이었다. 그런 몸에 착 감긴 듯 입혀진 정장은 옷을 잘 모르는 구구가 봐도 고급 브랜드의 것임이 느껴졌다.
"구구 씨군요."
남자가 말했다. '구구 씨인가요.'가 아니었다. 남자는 한눈에 구구를 알아보았다.
"누구십니까?"
"우선 들어가서 제 소개를 해도 되겠습니까? 10월의 밤은 의외로 쌀쌀하군요."
남자는 구구의 허락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누가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로 미소 지으며 구구를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으로 쳐다보는데, 그것만으로도 구구의 마음속에 묘한 신뢰감이 생겼다.
"들어오시죠."
구구가 남자를 주방 식탁으로 안내했다. 남자는 몇 번 이용해 본 공간인 마냥 편하게 들어와 식탁 의자에 앉았다. 구구는 차라도 대접해야 하나 싶어 어수선하게 두리번거렸다.
"저는 캐모마일 차로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구구의 집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아는 것처럼 얘기했다. 실제로 구구의 집엔 최근에 구입한 캐모마일 차 티백 박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찬장 안에 놓여 있었고 안이 보이지 않는 문으로 닫혀 있었다. 이 남자는 구구의 집에 캐모마일 차의 존재 유무를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캐모마일 차의 존재를 확신했다.
남자 앞엔 캐모마일 차를, 구구 앞엔 인스턴트 블랙커피가 놓였다.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남자는 어떤 것에 놀랐을 건지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상황 자체가 놀람의 연속이라 구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곧 루루가 올 시간임을 깨닫고 조금 초조해졌다.
"아, 그분은 오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도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구구는 자신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남자에게서 불편함이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 소개를 하는 게 순서에 맞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무무입니다. 당신과 똑같이 이 세계에 남겨진 사람이지요."
"이 세계?"
"네. 이틀 전 외계인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기억하십니까?"
외계인이라는 단어에 구구가 흠칫했다. 여기서 그 단어를 들을 줄은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짐짓 놀라지 않은 것처럼 구구는 대답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외계인이 침공한 것도 커다란 이슈였는데, 그 이후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충격적이어서 기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거든요."
"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을 제가 임의로 남겨진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저 같은 사람을 말이지요."
"그렇다는 건, 다른 사람들은 일요일에 일어난 외계인 침공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이건 기억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일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되었거든요."
일어난 일이 없었던 것으로 바뀌는 것이 가능한지, 구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이해가지 않는 게 당연한 겁니다. 일어난 일이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었으니까요.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보다 고차원적 존재인 외계인이 일요일에 침공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인지할 수 없어요. 낮은 차원의 존재는 높은 차원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니까요. 단지 인간이라는 예외적인 지적 생명체는 과학이라는 기술을 통해 그 존재를 알아차렸습니다. 물론 알아차렸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즐겨보는 영화를 노트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무무는 구구가 주말에 영화를 즐겨보는 것까지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얘기했다.
"그 영화 속 인물들은 재생시간에 따라 결말을 향해 다가갑니다. 두 시간이라는 러닝타임동안 시간 순서로 이야기가 흘러가지요. 그 영화 속 인물이 지금 삼차원의 우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정지버튼이나 빨리 감기, 되감기가 없이 흘러가는 영화와 같은 거죠. 외계인은 그 영화를 보는 관람객과 같습니다. 관람객은 영화 속 인물을 볼 수 있지만, 영화 속 인물은 관람객을 인지할 수 없죠. 심지어 마우스 커서를 이용해 원하는 장면으로 되돌릴 수도 있고 일시 정지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그 과정을 전혀 체감하지 못해요. 바로 이 영화 속 인물과 관람객의 관계가 지금 인류와 외계인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무무가 잠시 말을 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구구는 그가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가 아는 관람객은 여러 버튼과 마우스 커서를 이용해 시간만 조작할 수 있지만, 이번 외계인은 편집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편집이 가능하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어제와 오늘을 보내면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구구는 반찬가게가 없어졌다는 것, 그리고 어젯밤 자신의 루틴을 한 번도 깬 적이 없던 루루가 그 루틴을 깼다는 것이 떠올랐다. 떠올린 것들을 말하자 무무는 바로 그것이 외계인의 개입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개입하는 순간 개입 전에 있었던 것들은 존재하지 않은 것들이 됩니다. 구구 씨가 말씀하신 반찬가게의 존재가 사라지고, 루루라는 여성의 루틴이 사라지는 것, 그리고 오늘 루루라는 여성이 이 집에 오지 않는 것까지 말이죠. 정확히 말하면 루루라는 여성이 오늘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죠?"
"당신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개입했습니다. 루루라는 여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도록, 그녀가 아직 뱃속에 있던 시점으로 돌아가 낙태라는 편집을 한 거죠."
"그게 말이 된다고 봅니까?"
"직접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전화를 한 번 걸어보시죠."
구구는 스마트폰을 꺼내 루루의 연락처를 찾았다. 그런데 통화목록에도, 연락처에도 루루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구구는 외우고 있던 루루의 전화번호를 떠올리고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버튼을 누른다. 세 번의 연결음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로 너머로 낯선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루의 전화가 아닌가요?"
구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방은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 무뚝뚝한 답과 동시에 끊어버렸다.
"제가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건 이 세계에 남으면서 생긴 조금 특별한 능력 덕분입니다. 편집된 것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차린 다는 거죠. 루루라는 사람이 편집되는 과정을 알게 되면서 당신에 대한 정보도 알게 된 겁니다. 가령 루루 씨가 이 장소에 왔다는 정보, 그녀가 찬장을 열러 캐모마일 차를 보았다는 정보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꽤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무무는 잠자리 같은 아주 사적인 정보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런 구구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무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제가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기준에 의해 선택된 정보만 인지합니다. 제가 임의로 해석을 해보자면, 그들이 편집하기 위해 손댄 곳이 정보로 흘러들어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당신과 저처럼 남겨진 사람들은 모두 어떤 특수한 능력이 있는 겁니까?"
"남겨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구구 씨를 포함하여 두 사람 밖에 알지 못합니다. 현재로서는 구구 씨는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고, 다른 한 분의 경우에도 자신의 능력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남겨진 사람들에게 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라 무무 씨만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 아닙니까?"
무무는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 또한 그 사건 이전엔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남자였습니다. 일요일이 끝나고, 모두가 그 사건 자체를 잊었을 무렵 갑자기 능력이 생겼습니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정보들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내게 다른 사람은 경험하지 못하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구나, 라고요.
두 사람이 편집당하는 정보를 얻으면서, 외계인이 자신의 침공을 인간에게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는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남겨진 사람들이지요. 어째서 우리만 기억이 지워지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이유를 모릅니다. 다만 추측해 보건대 우리의 유전자 중 발현과 아무 상관이 없어서 변형이 되어도 무관한 어떤 부분이 기억 삭제로부터의 저항성을 나타낸 게 아닐까요. 물론 저는 유전학자가 아니라서 사고(思考) 추측일 뿐입니다만."
구구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시계를 흘끔 쳐다봤다.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루루는 구구를 만나는 동안 한 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었다. 연락이 되지 않은 적도 없었다. 무무의 말대로 루루의 존재가 삭제되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저를 찾아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무의 긴 설명 속에는 구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없었다.
"사실 아무런 목적이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혼란스러워할까 봐 말씀을 드리고 싶었던 것뿐이었습니다. 그런 혼란을 겪는 사람이 당신 말고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약간의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확실히 구구가 이틀간 겪었던 혼란이 조금 진정되긴 했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혼란이 찾아와 결국 혼란의 총량은 변함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를 포함하면 총 세 명의 남겨진 사람들의 편집된 내용을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게 우리를 세계에서 지워내려 하고 있습니다."
"편집이 가능하다면, 우리 주변을 바꾸는 것보다 우리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더 쉬운 방법 아닌가요? 루루의 존재를 지워낸 것처럼."
그 질문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무무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손댈 수 없는 모양입니다. 저희가 종이를 마음대로 자르고 싶어도 종이 가운데 박힌 철심은 가위로 자르지 못하듯이요. 세계가 종이라면 저희가 바로 그 철심 같은 존재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남자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제 명함입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했습니다."
남자가 떠난 집엔 정적만이 흘렀다. 외계인도 모자라 반찬가게가 사라지고 루루가 없어졌다. 초현실적인 일의 연속만으로 이미 혼란스러운데 그 혼란스러움을 확실히 해주는 무무라는 남자가 등장했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구구는 밤새 고민해 봤지만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결론으로 도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