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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의 집에서 나온 무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깥 부분을 면도날로 살짝 도려낸 듯 줄어든 푸른색 달이 무무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다.
무무는 그 시선을 피해 지하철 역으로 들어간다. 지하철을 타고 집 근처 역에서 내려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구름이라도 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지상에 올라오자마자 달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무는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냉장고를 열어 냉수를 한 잔 가득 부어 마시고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암막 커튼을 단단히 쳐 둔 거실에서는 달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남겨진 사람들 중 구구가 아닌 다른 한 명의 편집된 정보가 주입된다.
그녀는 자신의 힘듦을 달래주었던 공간이 사라진 것에 좌절하고 있다. 칵테일 바가 있던 2층 건물이 갑자기 사무용품 업체로 바뀌어 버렸다. 그녀가 당황해하며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만 발이 꼬여 굴러 떨어진다.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시선이 방황한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허겁지겁 자리를 떠난다. 주입된 정보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무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다음 날 해가 떠서 하루 일과가 시작되고 해가 지며 마무리되길 기다렸다가 찾아가 어제 겪은 그 상황이 편집되었다고 설명하는 수밖에. 무무는 자신이 이렇게 편집된 정보를 얻는 것을 능력이라고 칭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은 이것은 저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편집에 대해 그 사실을 당사자들에게 알려준들 변하는 것은 없었다. 무무의 내면에 조금씩 무력감이 차올랐다. 어쩌면 그들은 무무를 무력감으로 가득 채워 세상에서 지워내려고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지 무무는 굴복하지 않겠다고 재차 스스로를 다독였다.
구구는 하루에 한 번씩 실수를 저질렀다. 실어야 할 물건이 누락되거나, 두 지점의 물건이 섞이거나 하는 평소에 전혀 실수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금요일이 되었을 때 사장이 구구를 호출했다. 몇 년간 실수 한 번 없었던 구구였기에 불미스러운 일로 부름을 받은 것에 매우 불편한 마음이었다.
사장실은 심플하면서도 아담했다. 손님맞이용 식탁과 테이블이 입구 왼쪽 모서리에 준비되어 있고, 오래되어 광택이 빠져 더욱 탁해진 회색 철제 서류함이 오른쪽 벽면을 가득 메웠다. 소파와 철제 서류함이 마주 보는 왼쪽 가장 먼 모서리에 쪽에 사장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예스러운 문양이 들어간 다갈색 원목 책상에 유리판이 놓여 있고 그 위에 각종 서류와 문구, 탁자용 서랍이 올려져 있다. 특이한 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구리로 만든 손바닥만 한 비둘기 상이 명패 옆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날개를 편 것도 접은 것도 아닌, 날기 직전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인상 깊은 동상이었다. 꽤 많이 쓰다듬었는지 머리와 등 부분이 반질반질하다. 눈동자 없는 눈에서 날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거기 앉게."
사장이 앉았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가죽회전의자가 사장의 무게를 토해내듯 심하게 삐걱거렸다.
구구는 사장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측면 2인용 소파에 앉았다. 사장은 구구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상석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구구 씨, 요즘 힘든 일이라도 있나?"
사장이 '점심은 챙겨 먹었는가'와 같은 가벼운 뉘앙스로 말했다. 구구를 질책하려고 하기보다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잠을 조금 설쳤더니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실수하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자네를 질책하려는 것이 아닐세. 일 하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어차피 그 자리는 자네 만큼 훌륭히 해내는 사람도 없으니까. 나는 단지 자네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부른 거라네."
"자금 조금 설쳤을 뿐입니다. 내일부터 주말이니 푹 쉬고 나면 괜찮을 겁니다."
질책이 아닌 것에 내심 안심하면서도 실수에 대한 마땅한 구실이 없다는 게 구구의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피곤했던 것뿐인가? 나는 자네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짐작했다만."
사장이 구구를 똑바로 응시한다. 구구는 외계인 침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무무가 분명 남겨진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그 일은 없던 것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자신이 외계인의 침공에 의해 자신이 일상이 뒤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피곤이라는 변명거리가 정신 질환이라는 큰 문제로 변질될 우려가 있었다.
"자네는 아직까지 제대로 쉰 적이 없지 않은가. 이번 기회에 한 번 쉬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어쩌면 제대로 쉬지 않아 누적된 피로가 지금에 와서 어떤 부작용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자네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잠시 부탁해 보겠네. 자네가 맡은 자리가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자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없다고 회사가 멈출 정도는 아니라네. 누군가는 결국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러니 걱정 말고 쉬었다 오게."
사장은 구구에게 이 주일이라는 기간을 주었다. 휴가마저 반납하며 일하던 그였기에, 그렇게 긴 시간을 쉬어도 되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 고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장이 말했다.
"이건 사장으로 자네에게 내리는 명령이야."
회사를 나온 구구에게 이 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주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휴가에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평소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혼자만의 시간이 많이 필요한 취미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루루를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젠 그 루루마저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지만.
할 일이 없지만 마땅히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 정처 없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정처 없이 걸었다고 믿었는데 무의식은 구구의 발길을 익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는 어느새 조명가게 앞에 서 있었다. 조명가게 안에는 주인아주머니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따금 특정 상품을 가리키기도 하고 직접 가까이 가져와 보여주기도 했다. 손님과 주인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듯 겉으로 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얘기 도중 주인과 구구의 시선이 마주쳤다. 구구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도 만나는군요."
아래를 보고 걷던 구구의 시야가 한순간 어두워졌다. 체격이 좋은 남자가 구구 앞에 선 채 웃고 있었다. 무무였다.
"저도 여기에 볼일이 있던 참이었거든요. 마침 잘 되었군요. 이번 기회에 삼자대면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무무의 뒤에서 여성이 나타났다. 성별의 차이를 떠나 객관적으로 봐도 왜소한 여성이었다.
"우예요."
그녀가 겨우 들릴듯한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우는 150센티미터 정도로 보이는 작은 키에 날씬하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마른 체형이었다. 어려 보이는 몸과는 다르게 얼굴은 상당히 성숙했다. 초등학생 같은 체형과 성숙한 얼굴의 아이러니, 그 얼굴에 담긴 약간의 우울함이 구구에겐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구구입니다."
이름을 간단히 주고받고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로 가는 길에 무무는 체격에 맞지 않게 천천히 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가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는 것에 맞춰준 것이었다.
셋은 구석진 곳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창문이 없고 다른 테이블과도 동떨어져 있어 조용히 이야기 나누기 좋은 자리였다. 구구와 무무는 블렌드 커피를, 우는 밀크티를 주문했다.
"두 분 다 잘 지내셨냐고는 묻지 못하겠군요. 특히 우 씨는 어젯밤의 일로 충격이 더욱 크실 거라고 봅니다. 구구 씨가 겪었던 일이 우 씨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줄은 몰랐거든요."
구구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기 앞에 앉은 이 아가씨도 일상의 어딘가가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자신의 일상이 자신도 모르는 것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우는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부터 뭘 얘기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네요."
무무가 자기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구구도 우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우리가 뭘 해야 하는 걸까요?"
구구가 무무를 보며 물었다. 우는 뭔가 묻거나 답할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밀크티가 든 잔을 감싸 쥔 채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초점이 흐린 눈동자는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고,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우린 어항 속 물고기 같은 존재예요.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간다 해서 주인의 시선을 피할 수 없듯이, 우리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그들의 영역에서 벗어날 순 없을 거예요."
"애초에 우리처럼 남겨진 사람들이 거슬리는 존재라면, 대체 왜 우리를 살려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건 제 가정입니다만,"
무무가 입이 마른 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바꿀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즐겨 찾던 장소를 바꾸는 것도 아주 국지적으로, 조심스럽게 이루어졌지요. 생계유지에 필요한 직장이나 집을 없애버리면 간단한 일인데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달을 통해 시선을 느끼게 하는 것도 동일한 이유이지 싶습니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은 신기하게도 어떠한 물리적 영향을 받지 않을 때에도 시선은 느낄 수 있어요. 그들은 달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당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무얼 하든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라는 메시지로요."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대화도 다 보고 있겠군요."
"고차원적 존재에겐 우리가 벽이라고 생각했던 공간도 실제론 벽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일거수일투족 모두 감시당하고 있겠지요. 다만 이렇게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에 있으면 우리 스스로는 안전하다고 위로받을 수 있으니까요."
구구는 무무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상세하고 알고 있는 것에 의심이 들었다. 그것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무무가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저를 의심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저도 이런 것들을 알고 싶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알아버려 진 것이라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제가 두 분에게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고 있다는 것, 이것만이 제가 그들과 결탁하지 않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이긴 합니다.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거지요."
무무의 말대로, 그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패를 완전히 공개했다.
"일단 저는 2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생겼습니다. 많진 않지만 금전적인 여유도 조금 있고요. 그래서 제가 살던 곳을 떠나 지내볼 생각입니다. 제가 어항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인지, 혹은 이동한 그곳이 어항 밖이 될지는 제가 경험한 뒤에 판단해보고 싶습니다."
"저도 같이 떠날 수 있을까요?"
우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시선만큼은 구구라는 한 점을 명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미쳐서 죽을 것 같아요. 세상에서 나만 도려져 나가는 기분, 당신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적어도 여기에 있는 우리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도 있고, 공유할 수도 있잖아요."
구구는 남자와 떠나는 것에 저항감이 없다면 괜찮다고 허락했다.
"당신은 왠지 허튼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우의 말이 구구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것인지,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선지 모호했다.
"저는 여기에 남아있겠습니다.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두 분은 떠나셔도 좋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드렸던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무무는 둘의 연락처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셋 모두 자신의 음료를 반도 채 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구와 우는 내일 오전 기차역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구구는 무무가 말한 해야 할 일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필요한 이야기였다면 그가 분명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거라 생각했다.
헤어지면서 뒤를 흘끔 돌아봤다. 지난번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 전등이 이번에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깜빡깜빡깜빡, 깜빡, 깜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