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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가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날은 화창했다. 자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깊은 잠을 잔 모양이었다. 이불을 걷어내려고 움직이려는데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우가 뱀처럼 팔과 다리로 구구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구구의 상의 안으로 들어와 오른쪽 가장 아래 갈비뼈 위에 올려져 있었다. 꿈속에서 느꼈던 손길은 현실에서 우가 자신의 상의 속으로 손을 넣어 쓰다듬었던 그 감촉이 전달되었던 것이었을까.
구구의 뒤척거림에 우가 잠에서 깼다. 그녀는 구구의 상의 속에 넣었던 손을 빼고 구구의 하체를 옭아매었던 다리를 풀어준 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우는 자신이 한 행동이 친밀하지 않은 두 남녀 사이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옆 방은 난방이 되질 않아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구구를 보며 우가 말했다. 그녀의 방이 난방이 되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방에 조용히 들어와 그의 몸을 껴안고 자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설명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녀의 말대로 옆방은 난방이 전혀 되질 않았다. 우는 보일러가 돌아가고 시간이 지나면 방이 따듯해질 줄 알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너무 추워서 잠에서 깼다고 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충분히 떨어진 자리에 누웠는데 자신의 잠버릇이 무언가를 껴안고 자는 것이라 잠결에 구구를 껴안은 것 같다고, 덤덤하게 설명했다. 그녀가 구구의 몸을 조금 쓰다듬은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일이 발생한 것도 아니어서 구구는 이 일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맑은 아침의 마을은 어제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일찍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마트를 오가는 모습이 대문 밖에서 얼핏 보였다. 마트 옆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청년이 노란색 대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마을 이장이었다. 오늘도 마을 이장이라는 이미지와 전혀 부합되지 않는, 캐주얼한 검은색 정장차림과 그에 어울리는 검은색 패딩 코트를 걸친 모습이었다. 마을 이장이 아니라 거대 기업의 임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대문 밖에 나와있던 구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간밤에 별일 없었는지요?"
"작은 방에 난방이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구구는 우가 자신의 방으로 넘어와 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타인이 보기엔 연인의 여행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괜한 오해를 먼저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가 자신의 왼손 주먹으로 오른손 손바닥을 망치로 내려치듯 탁 두드리면서 놀라듯 감탄을 내뱉었다.
"어제 그 말씀을 안 드렸네요. 그 방은 난방이 고장 났어요. 집주인도, 여길 이용하는 어르신들도 늘 큰방과 주방만 쓰시다 보니 고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습니다. 큰방에서 두 분이 주무시기에 크게 무리는 없을 거라고 봅니다만. 작은 방이 필요하시다면 수리를 요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묵을 곳 없는 저희를 묵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공연히 일을 만들 순 없죠."
"간밤에 다른 일은 없으셨고요?"
이장은 이곳 마을에서 밤에 일어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구구를 통해 이야기를 듣겠다는 듯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구구에게 간밤의 일을 물었다.
"많이 조용하더군요. 이장님의 조언대로 밤에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어둡더군요."
"그렇군요. 앞으로도 밤에는 나가시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이곳의 밤은 많이 다르거든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이장이 한 말에서 반찬가게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 아닌가요.'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구구는 두 문장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다고 느꼈지만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거죠. 어떤 사고로 인해 마을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을 바라는 이장은 없으니까요."
이장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이다. 구구는 이장의 말이 그저 둘러대는 것임을 알아차렸지만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외계인 때문 아닌가요?"라고 어떻게 물을 수 있을까. 그로 인해 이상한 사람으로 몰려 여기서 묵을 수 없게 된다면 곤란하게 된다. 게다가 이장의 말은 평범하게 해석해도 꼬투리 잡을 부분이 없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에 외출을 삼가서 나쁠 것도 없으니까.
낮에는 이장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언제까지 머물지 모르니 한 번 둘러보는 게 좋겠다고 요청하자 이장이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농경지와 하우스재배지를 빼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도시의 번화가도 이보다 클 것 같다고 구구는 생각했다. 첫날 오면서 봤던 마트부터 식당, 우체국, 은행을 지나 구구와 우가 머물던 집의 반대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트가 취급하지 않는 농기구와 잡다한 것을 파는 작은 잡화점 하나, 녹이 가득 슬어 조명이 켜지기나 할지 의문이 드는 간판이 달린 오래된 의원(醫院) 하나와 구멍가게 크기의 약국을 끝으로 오래된 단층 주택들이 이어졌다. 같은 시기에 지어진 집들이 아닌지 벽도 지붕도 소재와 색깔이 제각각이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나름대로 있을 건 다 있어요. 놀거리가 부족하지만, 이 마을엔 젊은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고, 어르신들은 집에선 텔레비전, 모이면 화투를 즐기시거나 막걸리 한 잔 걸치며 정치인들 욕하는 게 전부라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어도 문제가 생기진 않더군요."
이장이 막다른 골목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길이 끊어집니다. 이만 돌아가죠."
"책이나 신문을 살 수 있는 곳은 없습니까."
"여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긴 젊은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어요. 다들 나이가 많으셔서 활자를 읽는 걸 힘들어하시죠. 저는 종종 책을 읽습니다만, 저 하나 때문에 마을에 서점이 들어올 리 만무하죠. 그래서 택배를 통해 받아보고 있습니다. 저희 집에 책이 많이 있으니 필요하시다면 내일 몇 권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구구는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걸어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 칠이 벗겨진 황색 대문 앞에 도착했다.
"일단 이거라도 괜찮으시다면 빌려드리겠습니다."
이장은 들고 있던 검은 가죽의 서류가방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고맙습니다. 오늘 밤의 지루함을 어떻게 넘겨야 하나 걱정했는데 한 시름 놓이는군요."
이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돌아갔다.
"어디 갔다가 온 거예요?"
둘의 말소리를 듣고 우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며 물었다. 언제 화장을 했는지 어제 시장에서 마주쳤던 그날처럼 얼굴이 화려했다. 구구는 이장의 도움을 받아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왔다고 했다. 재미난 거리라도 가져올 줄 알았는지 우는 약간 김이 샌 표정을 지었다.
"점심 먹어요."
우가 방으로 들어갔다. 마을 사람 누군가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이 장면을 보면 연인이나 부부로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고 구구는 생각했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이장이 건네준 책을 확인했다. 흑연으로 그려 인쇄한 듯 그로테스크한 표지에 커다랗게 '1984'라고 붉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구구의 마음이 크게 출렁였다.
다음 주는 휴가로 인해 쉬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