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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장은 이곳에 구구와 우가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해선 안될 것과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었다. 엿새라는 기간은 누군가를 해치기에 적은 기간이 아니었다. 그의 경고가 아니었으면 그는 손 하나 쓰지 않고도 구구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장은 그러지 않았다. 가끔 미심쩍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구구는 결론을 내렸다.
우는 안방에서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린 채로 누워있었다. 여전히 배가 아픈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매월 겪은 그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자세히 보니 이마에 땀도 가득했고, 방 안에 땀냄새의 시큼함도 베여있었다.
"우 씨, 아무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우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약국에서 진통제만 구해달라고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가는 목소리로 부탁했다. 억지로 데려갈 상황도 아닌 것 같아서 금방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구구가 다시 대문을 나설 때 마트 옆을 돌아 걸어오는 이장과 마주쳤다. 검은색의 클래식한 정장에 먹색 더블 모직코트를 걸친 채였다. 역시 이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었다. 그는 급히 대문을 나서는 구구를 불러 세우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우 씨가 많이 아픕니다. 진통제가 필요하다고 해서 약국에 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그동안 아가씨는 제가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열이 난다면 이마에 물수건이라고 올려주면 좀 낫지 않겠습니까."
당황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이장을 의심할 틈도 없이 구구는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약국으로 향했다.
약을 가지고 돌아왔을 땐, 신기하게도 우는 안정적인 상태가 되어 있었다. 구구가 약국을 가기 전만 하더라도 우는 고통을 참는 기미가 역력했는데, 지금은 곤히 잠든 모습이었다. 땀을 닦아 주었는지 젖은 물수건이 이장 옆에 반듯하게 접혀 있다.
"다행히도 잠들었습니다."
구구는 진통제를 우 옆에 내려놓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분명 우의 안색은 쉬이 잠들 수 있을 만큼 아픔의 정도가 낮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고 있었고 어떻게든 부축해서 병원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판단이 될 정도였다. 그런 우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다.
"제가 들어왔을 때 이미 잠들어 계셨습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셨길래 얼굴의 땀만 닦아드렸습니다."
구구는 그 말이 진짜인가 싶어 우를 다시 쳐다봤다. 그녀의 몸을 덮은 이불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구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장이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처럼 말을 길게 덧붙였다.
"어쩌면 지쳐서 잠든 걸지도 모릅니다. 탈진이라고 해야 할까요. 깨어나면 약을 드시시는 게 낫고, 병원에 갈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 병원이라고는 같이 보셨던 작고 오래된 의원하나뿐이지만 거기 선생님이 진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보십니다. 나름 이 마을의 명의예요."
"깨어나면 제가 한 번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갑자기 이렇게 일이 생겼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여기 머무는 동안은 저희가 신경 써야죠."
"저희요?"
이장은 순간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구구가 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장에게 가는 순간 일어난 변화였기에 구구는 이장의 표정 변화를 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신경 쓴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딘가 말이 안 되는 이유였다. 구구가 따져 묻기도 전에 이장은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것보다, 제가 여기 온 이유 말입니다.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해서 어디를 수리해야 하나 점검 차 올라왔습니다.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언제까지 머무실지도 모르는데 계속 고장 난 채로 두는 것도 아니다 싶더군요. 아, 물론 집주인인 박 씨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회관처럼 편하게 이용한 만큼 마을 관리비로 수리를 해주겠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제가 기술자는 아니지만 대략 어디가 고장이 난 건지 확인할 수 있으면 수리공이 여러 번 올 필요는 없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이 마을에 보일러를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서요. 구구 씨도 돌아왔으니 저는 제 할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는 창고 문을 열고 보일러를 꼼꼼히 둘러보고 거실 한쪽 벽에 설치된 컨트롤러의 버튼을 몇 번 눌러보더니 다시 보일러 실로 돌아가 연결된 수관을 하나씩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리고는 무슨 문제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큰방으로 이어진 관이 막힌 듯하네요. 보일러가 오래되어 석회가 찬 듯합니다. 정확한 건 수리 기사가 와야 알겠지만, 제가 어르신들 보일러를 봐주러 갔을 때 이런 증상을 몇 번 봤었거든요. 대부분 오래 사용해서 석회가 관을 막은 게 이유더군요. 아무튼 최대한 빨리 수리해서 이용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이장은 구구에게 목례를 건네고는 현관을 나갔다.
이장을 가까이하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 때문인지 구구는 이장과 마주하고 있는 내내 어딘가 불편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어딘가 어색하게 들렸다. 그가 구구에게, 혹은 둘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기고 있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구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장은 그들에게 어떤 잘못도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다.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여지가 없었다.
구구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면서 지내야 하는 것인지 후회가 몰려들었다. 외계인 따위 아무렴 어떻냐는 생각이 든다. 자주 들리던 반찬 가게 하나 없어진 것 가지고, 회사에서 실수 몇 번 한 것 가지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호들갑 떨 일인가. 루루의 존재가 사라진 것은 충격적이었지만, 이제 그 충격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였다. 무무는 그들이 우리를 제거하고 싶어 한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아가면 그냥 내버려 두지도 않을까. 속은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 수 있을 터였다.
무릎을 양팔로 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 와서 잠을 설친 적이 없었는데 눈을 감고 있으니 잠이 밀려왔다. 스트레스 때문에 피로해진 걸까. 구구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잠에 의식을 내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