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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한날한시에 이곳을 떠나버린 것처럼 어떠한 인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루루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령처럼 갑자기 나타났고, 연기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곳이 꿈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곳이 꿈속임을 인지하고 있음을 구구는 깨달았다. 자각몽일까. 꿈이란 원래 이렇게 몇 번이고 이어서 꾸기도 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이 마을에 들어올 땐 기차를 타고 왔는데, 그날 이후로 이곳에 기차가 오지 않았다. 오는 기차가 없으니 가는 기차도 없었다. 기차역엔 공허함만 맴돌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기차역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마트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먹을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마트를 통해 식자재를 얻어가는 방법뿐이었다. '얻어간다'는 표현이 마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이 마트에서는 그 단어가 통용되었다. 물건을 가져가서 비워진 자리는 다음번 방문 때 고스란히 채워져 있었다. 분명 마을엔 루루밖에 없고, 기차가 오가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는데 물건은 채워져 있다. 이것도 꿈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마트에서 필요한 식재료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당의 화로 앞에 루루가 불을 쬐듯 양 손바닥을 화로 가까이에 활짝 펼친 채 앉아 있다. 구구가 가까이 다가가보니 화로 안에 불씨가 없었다. 꺼진 지 오래되지 않았는지 남은 잿덩어리에서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의 온기가 참 좋아요."
루루가 말했다. 구구는 그녀의 말이 어떤 뜻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따듯한 건물이 주는 균일한 온기가 아닌 내가 다가가는 만큼 따스해지는 불의 온기. 너무 가까우면 뜨겁고 너무 멀면 추워지는 것. 적당한 거리를 내 마음에 맞게 정할 수 있는 것.
아침은 통밀식빵에 버터를 바르고 메이플 시럽을 곁들였다. 그리고 계란프라이 2개. 루루와 구구 각자 하나씩 나눠 먹었다. 루루는 자신의 분량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빈 접시를 싱크대에 놓아둔다. 아침 식사 이후로는 같이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필요한 것들을 구하러 다녔고 해가 지면 돌아갔다. 둘은 필요한 것을 구하러 다니는 행위를 '일'이라고 불렀다.
현실의 루루는 성적으로 강한 끌림을 느꼈던 여자였다면, 이곳의 루루는 그 부분을 제외한 모든 것에서 끌림을 주는 여자였다. 옷을 벗거나 정해진 날에 섹스를 하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행위를 하는 것에 비슷한 안정감을 느꼈다.
낮에는 장작을 구하러 가는 일을 하기로 했다. 겨울인 것도 있지만 루루가 오전마다 화로에서 소모하는 나뭇가지의 수도 무시할 정도가 아니었다.
대문을 돌아 마트 정 반대편으로 조금만 걸으면 등산로가 있었다.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잘 다져져 있어 운동삼아 오고 가기 좋은 곳이었다. 둘은 그곳에서 주로 장작을 구했다. 루루가 든 자루에는 바닥에 떨어진 잔 나뭇가지와 마른 낙엽을 담았고, 구구가 든 자루에는 적당한 높이에 달린 적당한 두께의 나뭇가지를 톱으로 잘라 넣었다. 이렇게 한 자루씩 가득 담아도 나흘이면 소진했다.
장작을 가지고 돌아와 화로 속 재를 긁어내고 마른 낙엽과 잔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넣었다. 불씨가 커졌을 때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넣는다. 불은 배고픈 아이처럼 나뭇가지를 넣는 족족 맛있게 녹여 먹었다.
겨울에 가까워질수록 루루가 화로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었다. 불을 보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도 있었고 불 앞에 앉아 책을 읽을 때도 있었다. 마당에는 햇빛을 가려줄 만한 게 없어서 그대로 내리쬐었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연약한 그 햇빛의 온기는 화로의 불 만하지 못했다.
"여기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었어."
구구가 커피가 든 잔을 루루에게 내밀며 말했다. 처음에는 현실의 시간과 맞물려 움직이던 꿈속의 시간이 조금씩 앞지르더니 이제는 꽤 많이 차이가 벌어졌다.
루루는 별 다른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것을 왜 말하냐는 눈빛이었다.
"처음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오고 가지 않는 것이 두려웠는데, 요즘엔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이럭저럭 지낼 만 해 진 것 같아."
"여긴 그런 곳이니까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
루루의 말대로 이곳은 누구의 방해도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루루마저도 그를 방해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구구가 귀찮아하거나 싫어할 만한 행동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그의 곁에 머물렀다. 구구는 마음만 먹으면 그녀와 잠자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했지만,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감시로부터 벗어나고, 해야만 했던 일들에서 벗어나니 그에 대한 반발로 치솟던 본능이 희미해졌다.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구구는 생각했다.
"고구마, 구워 먹을까?"
"좋아요."
오늘 가져온 식재료들 사이에 주먹보다 조금 작은 고구마 네 개가 포장된 것이 있었다. 구구는 흐르는 물에 고구마를 씻어 물기를 닦은 뒤 알루미늄 포일에 꼼꼼히 싸 화로 속에 집어넣었다.
컵 속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옆에 앉은 루루를 잠깐 쳐다봤다가 몸을 앞으로 숙여 불의 온기를 쬔다. 나뭇가지를 집어삼킨 불에서 불티가 튀어 오른다. 구구는 이 시간이 영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