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온 단편집

비 오는 날

by 안온

비가 내렸다. 겨울의 시린 무심함도 아니고 여름의 거세고 거친 것도 아닌 사뿐사뿐 내리는 봄비였다.

곧 있을 전공수업을 빼먹고 도서관과 정문 사이에 있는 가로수 길을 걸었다. 도로 없이 인도만 넓게 깔아 놓고 곳곳에 앉을 수 있는 벤치도 있어서 학생들이 수업 사이사이 휴식공간으로 자주 이용하는 길이었다.

아침 일기예보 기상캐스터가 낭랑한 목소리로 이른 오후부터 봄비가 시작된다고 알렸지만, 일기예보 대신 햇살 가득한 아침을 맞이한 많은 사람들이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곳곳에서 학생들이 가방이나 신문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다음 강의가 있는 곳이나 도서관을 향해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비를 피하기를 포기했는지 어떤 것으로도 머리를 가리지 않고 태연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리는 비에도 우산을 쓴 사람이 오히려 드물었다.

맑은 아침 날씨에 사람들이 속은 날엔 특히 도서관 입구가 많이 붐볐다. 비가 그치길 바라며 멀리 어딘가를 초점 없이 바라보는 사람, 우산을 씌워줄 사람을 부르는지 휴대전화를 보며 손가락을 바삐 놀리는 사람, 움직여야 하는데 비 때문에 발이 묶여 동동거리는 사람, 우산을 펼쳐 들고 묵묵히 갈길을 가는 사람까지.

나는 비에 젖은 벤치에 구부정하게 앉았다. 옆자리엔 들고 있던 검은색 우산을 내려놓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거쳐가거나 나에게 고정되었다. 시선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어서 내가 직접 확인하지 않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감색 카디건을 함께 쓴 채 종종걸음으로 도서관 쪽으로 가던 커플이 나를 흘끔하더니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공허한 표정으로 그 눈빛을 마주했다. 여자가 흠칫하고는 남자에게 더 찰싹 붙었다.

벤치가 머금고 있던 빗물이 허벅지와 엉덩이를 적셨다. 허리를 펴고 등을 기대었더니 빗물이 곧장 등과 마주한 카디건을 뚫고 스며들었다. 그 아릿한 차가움에 몸이 흠칫 떨렸다. 자세를 바로 하니 얼굴에 곧장 비가 내렸다. 소리 없이 사뿐히 내리는 비인데도 얼굴에 닿는 순간 빗줄기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눈을 감고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러는 동안 비가 조금 거세어졌다. 비를 머금어 묵직해진 카디건이 내 몸을 짓눌렀다. 나는 이 적당한 짓눌림이 좋다. 체온을 잃은 누군가가 나를 안아주는 이 느낌.




비에 젖은 몸에서 체온이 쉴 새 없이 밖으로 빠져나가고 그만큼 내부에서 끓어올랐다. 위로 고개를 들어보니 이제 막 어린 새 잎을 가지에 달기 시작한 은행나무가 비를 막아주려는 듯 벤치 위로 굽어 있었다. 하지만 비는 어린잎들 사이사이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언제부터 앉아있었던 것일까. 저쪽 반대편 벤치에 웬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빗물에 젖은 머리가 귀를 덮고 내려와 무릎에 닿을 듯 말 듯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가 그녀에게서도 전해졌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약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비에 젖어 추위에 떠는 건지 소리 없는 울음을 참느라 그런 건지 내가 선 자리에서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떨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연하게 화장한 얼굴, 붉게 부어오른 눈가. 눈물과 빗물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미인이었다. 아니, 얼굴이 눈물에 젖은 여자는 원래 아름다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눈 주위를 닦아내고는 가만히 서 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리고 그녀 옆에 곱게 접힌 채 놓인 우산을 본 순간 그녀가 이렇게 비를 맞고 있는 이유가 내가 비를 맞고 있는 이유와 같다고 확신했다.

바지 주머니에 다행히도 젖지 않은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혹시나 겉이 젖었을까 봐 안쪽 면이 바깥으로 나오게 다시 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내가 내민 손수건을 빤히 바라본다. 이걸 받아 써도 되는 건지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수건을 조금 더 그녀 가까이 내밀었다. 손수건을 건네받으려 뻗는 손이 붉은 상처와 흙탕물로 뒤범벅이었다. 어디서 넘어진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손수건을 건네받는 너의 손끝이 나의 손끝에 스치듯 닿았다. 그녀의 손끝은 내 손끝만큼 시렸다.




그녀가 손수건으로 눈 주위를 닦고 이어 손을 닦는다. 그녀는 화장품과 흙이 묻어 더러워진 손수건을 돌려줘야 할지 고민한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빗물과 흙탕물 범벅이 된 손수건을 민망한 듯 내밀었다. 나는 돌려받은 손수건을 무심하게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다시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이 잠깐 흐른다.

나도 그녀도 왜 우산을 쓰지 않느냐고 묻진 않았다. 비는 무너져 버린 마음 대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를 가리기 위해서 우산을 써서는 안 되었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그녀였다. 입을 연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말을 토해냈다. 말 그대로 멈출 수 없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토해냈다. 가족들의 기대감, 흐려지는 꿈, 현실과의 타협, 막연한 불안감. 그것들이 '내가 아닌 나'로 만들고 있다고 그녀는 토해냈다. 나는 그녀의 토사물 같은 말을 대꾸도 없이 그저 경청했다. 말의 구토를 끝마친 그녀는 이윽고 눈물보가 터진 듯 소리 내어 울었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녀의 울음이 멎은 뒤에 내 얘기를 꺼냈다. 그녀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이야기들. 그 또래의 고민, 아픔, 걱정, 불안, 종국에 가서 이뤄지는 타의에 의한 타협. 그래도 잘 버텨내고 있다고, 이야기의 끝에 웃어보려 했는데 굳어버린 얼굴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괜찮으니까, 울어도 돼요.


내가 안간힘을 다해 웃으려 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일어서서 나를 안으며 토닥였다. 내가 지금 느끼는 한기만큼 차가운 그녀의 품이었다. 이를 악물고 눈을 꾹 감으면서 참아보려고 했던 눈물이 그녀의 품 안에서 터져 버렸다. 나는 소리 내어 서럽게 울었다.

빗줄기는 여전히 가늘게 내린다. 내 울음이 멎자 그녀가 한 발짝 떨어져 자신의 우산을 펼쳐 들었다. 어디로 가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그녀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우리는 같은 감정을 공유했고, 같은 눈물을 흘렸다. 그 이후는 각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더 고마웠던 시간이었는데, 먼저 말해주고 먼저 울어줬기에 나도 나를 바깥에 꺼내놓을 수 있었는데. 정작 나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뿐만 아니라 그 어떤 말도 건네지 못했다.

우산을 든 그녀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도 나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만 비가 덜 닿아 밝은 색을 띠었다. 나는 그녀가 앉았던 자리 그대로 앉았다. 맞은편에 덩그러니 놓인 내 우산이 보였다. 비가 오는데도 주인을 잃은 모습을 한 우산을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산은 나처럼 쓸모없이 내팽개쳐져 있었다.

다시 홀로 남자 매섭게 추위가 찾아왔다. 몸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던 열기마저 한기로 바뀌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떨리고 이가 부딪혔다.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려는지 전보다 더 짙은 먹구름이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젖은 몸을 겨우 일으켜 발을 떼려는 내 앞에 키가 작은 여자가 우산을 쓴 채 서 있었다. 그녀가 내민 손에는 개나리 자수가 박힌 하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손수건을 보자 다시 눈물이 왈칵 솟았다.


고맙습니다.


나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든 손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으니 하얗던 것이 누렇게 변했다.

그녀가 돌려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나는 더러워진 손수건을 돌려주는 게 맞는지 몰라 주춤했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더 내밀었다. 그녀가 손수건을 받을 때 손끝이 살짝 스친다. 그녀의 손끝은 난롯불처럼 따듯해서 시린 내 손끝은 불에 덴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내게 한 발짝 더 다가와 우산을 씌워준다. 몸을 두드리던 빗줄기가 우산에 가로막힌다.

그러나 빗물에 체온을 빼앗길 대로 빼앗긴 내 몸은 떨림을 멈출 줄 몰랐다. 몸도 머리도 쇳덩이를 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온몸이 이토록 추운데 열은 쉴 새 없이 빠져나갔다.

서 있기도 너무 힘들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줄을 놓아버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나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서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버렸다. 내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더 차가운 젖은 바닥이 몸에서 나오는 미약한 열기마저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순간 몸은 쇳덩이처럼 무거워서 꼼짝도 못 하겠는데 마음은 봄바람에 실려가는 민들레홀씨처럼 붕 뜬 기분이 든다. 그녀를 한 번 더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줬던 기억,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했던 기억, 그녀의 품, 그 품 안에서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잠깐이었지만 위로를 받은 것보다 위로를 해준 것에서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그녀를 위로했던 게 아니라 그녀를 보며 나를 위로했던 것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내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내게 안겨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라는 존재도 환각이 아니었을까. 점차 호흡이 가빠지고 눈이 떠지지 않는데도 머릿속은 그녀에 대한 온갖 생각으로 가득했다. 시야가 차단되면서 예민해진 귀가 내게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알아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거림. 그 속에 묻어있는 다급함, 초조함, 불안감.


이봐요, 괜찮아요?


그들 중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빠르게 회전하는 회전무대에 올라탄 것처럼 어지러워 내게 걸어오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게 말을 걸었던 이가 바닥에 누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가 뺨을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전 괜찮아요. 이대로 내버려 둬요.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 다급히 뛰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 들어 올려지는 몸, 그와 동시에 아득한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의식. 나는 나를 놓아버렸다.




모두가 각자도생 해야 하는 시대. 청년들의 사회적 파편화. 그로 인한 얕은 연대. 지금 청년들은 위로받을 곳이 없습니다. 짊어진 짐의 무게는 나날이 늘어가는데, 그들이 정당한 이익을 조금이라도 챙기려 하면 '요즘 젊은것들은'이라는 말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신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에서는 쓰러지는 청년은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동료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경쟁 상대입니다.

내가 너무 힘드니까 남을 생각할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따스한 포옹이 아니라 조금 떨어져 건네는 손수건까지입니다. 얕은 동정심, 타인에게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는 거리 두기는 내가 살기 위한 필수 요소가 되었습니다.

결국 힘든 자신을 안아주는 것은 자신입니다. 슬프게도 내가 나를 안는 것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온기 없는 포옹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위로받았다고 위로하는 자기기만적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위로는 타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위로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자기 합리화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분명 한국은 정(情)이 많은 나라였는데, 언제부턴가 오지랖이라 비하하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사사건건 관여하는 오지랖이 아니라, 남의 아픔에 내 체온을 내어줄 수 있는 정이 다시 사회에 뿌리내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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