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사회

14

by 안온

이제는 너무나도 생생해져 버린 이곳. 루루와 구구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한겨울이 찾아오고, 얼음을 갈아 만든 듯한 날카로운 바람 때문에 화로에서 불을 쬐는 행위를 그만둔 것이 바뀐 것의 전부였다. 그 시간은 이제 안방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뜨거운 차를 식히기 위해 입으로 바람을 부는 소리, 뜨거운 것을 조심스레 마시느라 발생하는 호로록 소리,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 심각한 부분을 읽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앙 다문 한숨소리가 방 안을 맴도는 소리의 모든 것이었다. 구구에게 이불을 덮은 채 바닥의 온기를 느끼며 책을 읽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곁에서. 구구는 책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입가에 미소를 뗬다.


"오늘 3시에, "


루루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들을 때마다 단호함의 매력에 이끌리듯 귀를 열게 되는 목소리.

그녀가 책을 읽으면서 구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구구가 먼저 말을 걸면 귀찮다는 표정으로 몇 번 대답을 해주다가 이윽고 입을 완전히 다물어버렸다. 구구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더는 말을 걸지 않게 되었는데, 그녀가 말을 먼저 걸어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책을 내려 눈만 마주쳤다.


"역에 기차가 올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루루는 시선을 책으로 옮겼다. 구구는 뒤이어 나올 말을 기다렸지만 루루는 말없이 책만 읽을 뿐이었다.

구구가 기차역에 발길을 끊은 지는 한 달이 넘었다. 이곳에 오고 한동안은 기차역을 하루의 일과처럼 드나들었다. 그동안 기차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들어오는 기차도, 나가는 기차도 없었다. 역사 내에도 승차 시간표를 포함한 기차에 대한 정보가 담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잘 관리된 폐역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구구는 자신이 타고 온 기차가 역이 폐쇄되기 전 마지막 기차로 여겼다.

벽 한편에 걸린 시계를 보니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30분 정도 시간이 있었다. 구구는 정말로 기차가 오는지 궁금해서 읽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루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역으로 가는 길은 늘 똑같이 텅 비어있었다. 평소처럼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문득 이 공간에 대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단 둘이서 걱정 없이 느긋한 삶을 즐길 수 있는 곳. 그것은 이 장소가 주는 황홀한 이점이었다.

역으로 향하던 구구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다가 역 앞에서 완전히 멈추었다. 나는 정말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인가. 의문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현실의 기억이 거대한 쓰나미처럼 구구를 덮쳤다. 감시로부터 도망, 일상의 붕괴, 되돌릴 수 없는 세계. 모든 것들이 구구의 발길을 붙잡았다.

역 건물 중앙의 커대란 아날로그시계가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연히 타고 돌아가야 한다고 이성이 외치는데도 구구의 발은 바닥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구구가 서 있는 자리에만 중력이 몇 배로 뛰어 발을 단단히 묶어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을 찾던 게 아니었나요?"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색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 이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곳에 서 있었다.




구구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곧 해가 뜨려는지, 방 안은 북극처럼 시릴 만큼 검푸른 빛으로 가득했다. 유리창에 다가가보니 밤새 눈이 덮여 있었다. 하늘은 언제든 눈을 더 뿌릴 작정인지 짙게 먹구름이 껴 있었다. 하늘을 보면서 구구는 이곳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별을 본 적이 없었음이 떠올랐다. 별이라는 것이 이렇게 보기 힘든 것이었던가.

구구의 이부자리에서 한 뼘쯤 떨어진 자리에는 우가 정자세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보일러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지만 우는 잠귀가 어두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내린 눈은 어림 잡아도 무릎 위까지 쌓인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기차가 움직일 수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구구는 조금 전 꾼 꿈으로 생각을 돌렸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장의 살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가 단호하게 내뱉은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을 찾던 게 아니었나요?"

그의 말대로 구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꿈속의 세상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곳에서는 루루와 둘이서 행복한 시간만 보내면 되었다. 반복되는 잔잔하고 안온한 행복. 그러나 그가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꼭 구구를 그곳에 격리해야만 한다는 강제성이 담겨 있었다. 이장은 구구와 우를 이곳에 묶어두려는 누군가의 세작(細作)이었던 것일까. 현실에서의 이장이 지금까지 해온 행동 중에 구구와 우를 이곳에 강제로 묶어둘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그와의 대화를 복기해 봐도 둘을 위한 배려의 말들 뿐이었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을 때, 창밖으로 시커먼 물체가 좌우로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날이 어두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까지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주위가 조금 더 밝아지고, 형체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때야 그것이 눈을 헤치고 오고 있는 이장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널따란 쓰레받기처럼 생긴 제설삽으로 무릎 바로 위까지 올라오는 눈을 옆으로 치워가며 그는 힘겹게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던 구구를 발견한 이장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을 흔들었다. 평소처럼 검은 양복에 검은 패딩 차림이었다. 그는 구구의 인사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듯 다시 눈을 양쪽으로 치워가며 다가왔다. 그 모습이 순백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악마처럼 느껴져 구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장은 정직하게 구구가 머무는 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슨 연유로 눈을 치워가면서까지 이곳에 오는 것일까. 눈이 갑자기 쏟아져서 이장이 더는 걸어오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장은 기어코 대문 앞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이장은 현관문 옆에 제설삽을 세워두고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철제 현관문의 묵직한 소음에도 우는 꼼짝하지 않았다. 구구는 문을 열어주기 싫어 느릿하게 걸어 나갔다. 이장은 재촉하는 것 없이 첫 노크 이후 얌전히 기다렸다. 다시 한번 두드리거나 이름을 부를 법한데도 그러지 않았다. 현관문 너머는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정적만이 흘렀다.

구구는 끔찍한 일을 행하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채 현관문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이 열리고 맞은편엔 이장이 서 있었다. 미처 다 털어내지 못한 눈이 머리와 어깨, 그리고 몸 곳곳에 먼지 덩어리처럼 붙어 있었다.


"간밤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네요."


눈을 치우면서 오느라 숨이 가빠진 이장이 하얀 입김을 반복적으로 내뱉었다.


"조금만 쉬었다가도 되겠습니까? 저 아래에도 치워야 하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아, 그렇다고 도와달라는 건 아닙니다. 조금 더 밝아지면 마을 주민들이 나와서 도와주거든요. 저는 그전에 큰 길만 조금 치워두는 것뿐입니다."


이장은 구구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남은 눈을 재차 털어내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이장이 배려로 머물고 입는 입장이라 그의 막무가내에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구구는 그를 주방으로 들이고 따듯한 차를 내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장은 차가 담긴 머그컵을 양손으로 감쌌다. 장갑을 꼈음에도 양손이 추위에 새빨개져 있었다. 그는 손을 녹이기 위해 머그컵을 돌려가며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새벽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구구가 커피가 담긴 잔을 내려놓으며 이장 맞은편에 앉았다.


"우 씨는 아직 주무시는 모양입니다."


이장이 보이지 않는 우의 안부를 물었다. 구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눈이 올 줄 알았다면 어제 돌아갈 걸 그랬습니다. 철길에도 눈이 쌓이면 아무래도 열차 운행에도 차질이 생길 테니까요."

"돌아갈 생각이십니까?"


이장이 물었다.


"여기에 언제까지고 머물 순 없으니까요. 슬슬 직장에도 돌아가야 하고요."


구구는 자신이 꾼 꿈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왠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오늘은 기차가 운행하지 않을 겁니다."


이장이 말했다. 너무나도 단호한 말투여서 마치 기차 운행의 결정을 이장 본인이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들렸다.


"여긴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게다가 산골이죠. 하루쯤 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는 없을 겁니다. 기차는 아마도 이곳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산골짜기 바로 앞 역까지만 운행할 겁니다. 신기하게도 그 산골짜기를 기준으로 여기는 눈이 오고 거기는 비가 내릴 때도 있거든요. 여기가 일종의 분지 같은 곳이죠. 그러니 눈이 치워지고 녹을 때까지는 머무시는 게 어떠십니까? 길어도 이틀이면 열차가 들어올 수 있게끔 치워 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구구는 이곳에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더 머물렀다가는 이곳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이 여기를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야. 온몸의 세포가 그렇게 부르짖는 느낌이 들었다. 이장은 구구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말을 이었다.


"날이 좋을 때도 다음 역까지 걸어가는데 두 시간은 걸립니다. 낮긴 해도 산을 넘어가기도 해야 하고요. 게다가 눈이 이렇게 왔는데 산길은 치우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면 눈에 파묻혀 산길 자체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고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장의 얼굴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구구가 말을 이으려 하자 이장이 가로챘다. 구구는 그날 처음 이장의 굳은 표정을 보았다. 표정만으로도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저 안에 아가씨처럼 푹 주무시면 안 됩니까? 서로 피곤하게 굴지 맙시다. 당신이 바라는 건 거기에 다 있잖아."





초고는 17~18회로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매번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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