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사회

15

by 안온

무무가 그 남자를 만난 것은 구구일행이 기차를 타고 떠난 다음 날이었다. 주말에 먹을 것을 사러 마트에 들렀다가 출구 쪽에 서 있는 남자와 마주쳤다. 검은색 정장 위에 간절기에 입기 좋은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 그는 자신이 한 마을의 이장이라고 소개하면서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무무를 불러 세웠다. 평소 같았으면 사이비 종교나 호객 행위라 생각하고 뿌리쳤을 텐데 그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었다.

둘은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인사치레 비슷한 말들만 오갔다. 이장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자신 앞에 놓인 커피에 입김을 불어 조금 식히고는 한 모금 마셨다.


"이런 것을 누릴 때마다 사람은 역시 도시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이 든답니다."


남자는 다시 한 모금 더 마시고 본론을 꺼내려는 듯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이번에 저희 마을로 남겨진 분들이 오셨더군요."


무무는 놀란 표정으로 이장을 바라봤다. 이장의 입에서 분명 '남겨진 분'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은 무무가 편의상 사용하는 말이었고, 지금의 사태에 남겨진 무무와 구구, 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무무가 되물었다. 이장은 정확하게 확인시켜 주려는 듯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남겨진 분들이 오셨습니다. 당신이 만든 말이죠. 그들의 침공에도 기억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무는 내면 깊은 곳에서 공포가 일었다. 지금까지는 달이나 다른 매개체를 통해 시선(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 남자의 등장은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직접적인 대면과 다름없었다.


"고작 두 명의 기억을 볼 수 있다 해서 당신을 포함한 세명만이 특별하게 남겨졌을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꽤 많았습니다. 저도 포함해서 말이죠. 인간이 개미 집단의 개체를 모두 셀 수 없듯이, 고차원적 존재인 그들도 놓친 인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 존재자의 압력을 못 버텨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문제는 저와 당신 같은 부류들이었죠. 분명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세상 사람 모두가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일상을 살고 있고,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이장은 거기까지 단숨에 말하고 숨을 고르려는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 가닥의 커피 향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커피를 마신 이후에도 컵을 얼굴 가까이 가져간 채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면 이 맛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군요."


이장은 아쉬운 듯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모든 인간을 자신의 감시하에 두기 위해서는 남겨진 사람들을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가장 첫 번째 시도한 방법이 바로 정신적 압박을 통한 자살이죠.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 그 시선에 의해 일상을 영위할 수 없다는 무력감.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한다는 생각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죽음으로 몰아가기 쉽죠.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이 포섭입니다. 당신이나 저처럼 그런 기묘한 상황에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을 포섭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고립입니다. 그들을 감시할 가치조차 없는 곳에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저희가 하는 일이 바로 포섭되지 않은 생존자들을 고립시키는 일이고요."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 대한 대비라고 하면 이해하실까요? 감시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골칫덩어리거든요. 세상은 확신에 찬 말로 굴러가지 않아요. 흐릿한 사진 하나가 더 매끄럽게 굴리는 법입니다."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내버려 둬도 되는 것 아닙니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백 퍼센트 확신하실 수 있나요? 저희는 그런 어설픈 희망에 모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 당신을 만나러 온 것은 그런 희망에 걸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을 설득하기 위해섭니다. 그들이 저희 마을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협력해 준다면, 당신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지요. 시선과 그들의 편집된 기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조건이라면 당신께 상당히 매력적일 거라 보는데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 다시 일상의 영위. 무무에게 그 말들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사실 그 둘과 같은 입장에 놓여 있지만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자꾸 불편함이 솟아올랐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내면의 목소리. 양심, 도덕, 윤리 혹은 그저 무무의 성장과정이 만들어 낸 무의식 같은 것들.


"물론 지금 바로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이 이 주간 머무르겠다고 제게 말했거든요. 그동안 고민해 보시고 이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이장은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갈색 가죽 반지갑을 꺼냈다. 브랜드를 잘 모르는 무무가 봐도 가죽의 색이나 광택이 고급스러웠다. 이장은 지갑에서 하얀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마을 이름과 본인의 이름, 이장이라는 직책, 그 아래 자그맣게 적힌 연락처가 전부인 심플한 명함이었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장이 자기 앞에 놓인 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이장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무무는 한참을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 긍정적인 답변인 걸까. 그 둘이 이장의 말대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로 고립된다고 했을 때, 자신의 자유는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을까.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저 이용만 당하고 자신도 버림받지 않을까. 혹은 그 두 사람에게도 같은 제안을 한 게 아닐까. 무무와 구구 일행 중 어느 쪽도 협력하지 않으면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장이 자신의 손해-어떤 손해인지는 무무는 알 수 없지만-를 감수하기 위해 어느 한쪽의 고발을 바라는 치킨게임인 것일까.

무무는 이장이 건넨 명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언가 한참을 고민하는가 싶더니 명함을 반으로 깨끗이 접어 쟁반 위에 올려놓고 다 마신 음료컵과 함께 카운터에 반납했다. 꽉 다문 입술만이 무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보여주었다.




무무는 구구가 떠난 지 2주가 되는 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장이 자신에게 선택의 시간을 똑같이 2주를 주었다는 건 그 기간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말로 이해했고, 실제로 2주 동안 무무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구구와 우가 꾸는 꿈에 대한 정보들을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들 주변이 편집되는 과정의 기억이 아닌, 그들 자체가 현실에서 꿈속으로 조금씩 도려내어 옮겨지는 정보들. 구구는 따듯한 물에 담가 놓은 사탕처럼 조금씩 녹아들어 가는 반면, 우는 설탕처럼 급격하게 녹아들었다. 처음에는 그 꿈으로부터 둘을 끄집어내기 위해 연락을 하려 했었다. 하지만, 꿈속에서의 구구와 우의 모습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무무는 자신이 그들을 현실로 다시 불러오는 게 정말 그들을 위한 일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감시 속에서 늘 긴장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보다 원하는 공간에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꿈속을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아닐까.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속에서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2주가 흘러버렸던 것이었다.

무무가 2주째 되는 날 구구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게 된 이유는 우가 꿈에 대부분 잠식된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그녀가 다시는 현실로 돌아올 수 없게 될 상황이 되어서야 무무는 깨달았다. 우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곳을 선택한 게 아니라 현실을 버린 것뿐이었다.

꽤 여러 번의 신호음이 들려온 뒤에 구구가 전화를 받았다. 무무는 자신이 전달해야 할 말에 온통 집중하느라 인사하는 것을 잊고 바로 본론부터 꺼내버렸다.


"썩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우 씨가 최근에 많이 아프지 않았던가요? 그녀의 꿈을 제가 엿보게 되었거든요. 아무래고 우 씨는 현실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무무는 이후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구구는 곧장 상황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말을 따르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둥근 면이 남쪽으로 살짝 기운 상현달이 떠 있었다. 양쪽 끝이 뾰족하게 올라간, 웃고 있는 악마의 입술 같은 모양이었다. 달을 응시한 순간 무무는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 직감했다. 이장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반(反)하는 행동까지 취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무무의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무무는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바깥의 누군가는 집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개의치 않다는 듯 아니, 오히려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 잠금장치를 풀고 들어왔다. 발소리가 짐작컨대 적어도 셋, 혹은 그 이상이었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일까.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구구 씨."


무무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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