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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의 급변한 태도에 구구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를 꽉 문 이장의 얼굴은 분노와 짜증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장의 높아진 목소리에도 우는 자신의 이부자리에서 꼼짝 않고 자고 있었다. 너무 평온해서 잠든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얕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아니었다면 죽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저 아가씨처럼 그냥 편하게 자면 되는 일이야. 거기엔 네가 불편해하는 어떤 것도 없어. 너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희망사항들이 펼쳐진 곳이니까. 네가 좋아하는 사람, 네가 바라던 하루가 거기에 다 있어.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비정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단 말이야."
구구가 우를 흔들었지만 잠에서 깨지 않았다. 무무가 말한 대로 그녀는 이곳에서의 삶을 포기한 것인지도 몰랐다. 구구는 조금 더 과격하게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찰싹 소리가 날 만큼, 몇 번이고 두드렸지만 그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소용없어. 그녀는 이미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했거든."
구구는 이장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우의 팔뚝을 세게 꼬집었다. 그녀는 움찔하는 기미조차 없었다. 아무리 깊게 잠이 들었어도 이렇게까지 했으면 깨어나야 정상이었다.
"저는 떠날 겁니다. 이미 기차표도 예약했고, 해가 뜨고 제설작업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곧바로 여길 뜰 겁니다."
"이렇게 눈이 쌓였는데 기차를 타고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제설작업은 누가 지시하지? 내가 여기 이장이야. 평소에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렇게 눈이 쌓인 날 기차를 타고 오거나 기차를 타고 나가야 할 사람이 있을까? 하루 아니, 일주일을 운행하지 않아도 아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곳이 바로 여기야. 안전을 위해 당분간 운행을 쉬어가자고 부탁하면 철도 회사에서도 수긍해 주는 그런 마을이라고."
구구는 이장의 말을 무시하고 짐을 챙겼다. 옷 외엔 크게 풀어놓은 짐도 없어서 금세 챙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장은 문 옆에 서서 물끄러미 구구를 지켜보기만 했다. 어떤 방해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심지어 구구라 가방을 메자 쉽게 나갈 수 있도록 문 옆으로 비켜주기까지 했다.
"기차가 없다면 다른 이동 수단을 탈 수 있는 곳까지 걸어가면 됩니다."
그 말에 이장이 비웃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장 옆으로 지나갈 때, 문을 열고 나갈 때, 구구는 잔뜩 긴장했다. 순간 방심을 노려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온 신경은 곤두 세웠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방을 나와 현관을 열어 바깥을 디딜 때까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장은 계속 방 안에 머무르는지 현관문 안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구는 이장이 눈을 치우며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걸었다. 마트 앞에서 주거지 쪽으로 향하는 길만 눈이 치워져 있었고 역이나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은 길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창문으로 볼 땐 무릎 정도 높이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마주한 눈은 구구의 허벅지 바로 아래까지 닿았다. 저 앞에 하얀 눈으로 뒤덮인 역이 보이는데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차 운행은 불가능해 보였다.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방향을 거슬러 걸어가 보기로 하고 눈을 치우기 위해 가방을 뒤적거렸다. 이장이 빌려줬던 책이 보였다. 양장본의 표지를 뜯어 속지는 버리고 표지를 둘로 잘라 한 손에 하나씩 쥐었다. 지갑과 스마트폰만 챙기고 가방도 버렸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이동해야 했다.
구구는 양손으로 번갈아가며 앞의 눈을 치우고 길을 만들었다. 이곳에 오는 날, 기차에서 잠들지 않았다면 역 간의 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알았을 텐데.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그저 체력이 동나기 전에 다음 역에 도착하길 바랐다.
몸에선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무릎 아래는 눈이 닿아 완전히 젖어버렸다. 젖은 옷이 체온을 삽시간에 앗아갔다. 처음엔 시리더니 나중엔 아렸고 지금은 무감각했다. 이게 동상이라는 걸까. 그래도 걸음이 걸어지는 것을 보면 심각하진 않을 거라고 구구는 생각했다.
숨이 차서 종종걸음을 멈추면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구구는 어딘가에 숨어서 눈을 파헤치고 걸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며 비웃고 있을 이장이 떠올랐다. 하지만 등 뒤로 펼쳐진 풍경 속에는 이장이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어슴푸레했던 새벽은 아침을 지나 정오에 가까워졌지만 먹구름 때문에 주위만 밝아졌을 뿐 여전히 세상은 잿빛이었다. 저 멀리 자신이 떠나 온 마을이 보였다. 처음부터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던 마을처럼 인적이 없다. 구구가 눈을 헤치고 걸어온 길만이 이 마을을 벗어나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몇 시간을 눈을 헤치며 걸었더니 몸이 축난 게 느껴졌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쇳덩이처럼 무겁기까지 했다. 구구는 지금 서 있는 자리의 바닥까지 눈을 쓴 뒤 그대로 주저앉았다. 엉덩이의 체온에 바닥에 남아있던 눈이 녹으며 차갑게 스며들었다.
"하……."
구구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종종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내는 소리를 제외하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던 이곳에 어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자연의 소리가 아니었다. 어떤 강한 힘에 의해 커다란 물체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구구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걸어왔던 방향에서 검은색 기차가 오고 있었다. 의심할 것 없는 기차였다. 그것은 육중한 엔진소리를 내며 구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루루의 말이 맞았다. 기차가 왔다. 언제 치워놓았는지 철로는 제설작업이 되어 있었다. 앞만 보지 않고 조금만 시선을 옆으로 돌렸으면 철로가 치워진 것을 볼 수 있었을 터였다. 구구는 허탈했다. 자신도 모르게 루루보다 이장의 말을 믿었다. 그것은 현실과 꿈만큼의 괴리가 존재했던 터라 이장의 말을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라고 구구는 생각했다. 내가 현실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던 루루의 말을 확인해 보기 위해 역까지 가보기라도 했더라면 저 기차를 탈 수 있었을 거라고 밀려오는 후회를 곱씹었다.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서 역에서 기다리면 다음 기차가 올까. 이대로 가던 길을 가서 다음 역에서 기차를 타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그냥 다 포기해 버릴까. 구구는 더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몸을 살짝 틀어 눈 위에 기대어 누웠다. 쌓인 눈의 삼분의 이 가량 높이에 몸이 파묻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옆에 쌓여 있던 눈 일부가 구구의 얼굴에 떨어졌다. 목도 마른 참이어서 구구는 떨어지는 눈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눈이 달았다. 갈증 때문에 단 것인지 정말로 눈에서 단맛이 나는 건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거대한 존재로부터 감시를 피해 온 것일 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이를 감시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삶에서 추방당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영원히 감시받지 않는 곳으로 몰아넣었다. 이장의 말대로, 우의 선택처럼 그곳에 살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체온에 녹은 눈이 몸에 달라붙고 달라붙은 물이 겨울바람에 닿아 시렸다. 이토록 시린데 포근한 이불에 감싸진 것처럼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만년설이 덮인 고산지대에 쓰러진 사람들이 이런 기분에 잠드는 것일까. 구구의 의식이 깊은 어둠으로 서서히 침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