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사회

17

by 안온

무의식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꿈의 마을이었다. 눈의 윗부분이 환해졌다.¹ 이곳에 머무는 꿈을 꾸면서 이토록 현실의 감각이 생생하게 남아있던 적은 없었다. 꿈속 마을 역시 눈이 가득 내렸지만,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인도와 도로는 깔끔하게 제설작업이 된 상태였다. 루루 그리고 단 한 번 마주한 이장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누구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치워 놓은 듯 말끔했다.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날이 맑았다. 바닥에 쌓인 눈만큼 새하얀 뭉게구름 몇 점이 파란 하늘이 휑뎅그렁하지 않도록 그 위를 부유했다. 구구가 자기 다리를 내려다봤다. 눈이 달라붙어 녹으며 젖었던 바짓가랑이가 말끔했다. 구구의 신체 어디에도 눈이 녹아 젖은 곳이 없었다. 동상에 걸렸던 다리는 작은 모래 한 알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서야 그가 방금, 막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도 여전히 겨울이었다.

구구가 익히 알고 있던 길을 거슬러 걸었다. 상품만 가지런히 진열된 익숙한 모습의 마트가 그의 오른쪽에, 솜이불을 덮어 놓은 듯 일정한 두께의 눈 덮인 지붕의 기차역이 왼쪽 저 멀리 보였다. 구구는 오른쪽 마트를 끼고돌았다. 익숙한 골목이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어 검붉게 변한 황색 대문이 달린 집이 나타났다. 꽉 다문 입술처럼 굳게 닫혀있는 대문을 살짝 밀었다. 녹슨 경첩이 길게 늘어지는 쇳소리를 내는 것과 반대로 대문은 부드럽게 밀렸다.

시멘트 바닥의 마당 중앙에 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감나무 하나, 대문과 가장 먼 코너 담벼락에 다른 감나무 하나가 심겨 있다. 중앙의 감나무 옆에는 무릎 높이의 수도관이 하나 툭 튀어나와 있었고, 수도관이 얼지 않도록 은박 보냉재로 둘둘 말려 있었다. 마당 한편에 놓인 드럼통을 뜯어 만든 간이 화로는 최근에 청소를 했는지 재가 깨끗이 치워진 상태였다.

구구는 자연스럽게 마당 중앙 감나무를 둘러싼 돌들 중 하나를 살짝 들어 올려 그 밑에 깔린 열쇠가 담긴 봉투를 꺼냈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 돌리자 자금장치가 경쾌한 쇳소리를 내며 풀렸다.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무릇 집이라면 들려야 할 생활 소음도 전혀 없었다.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구구는 자신이 눈을 깜빡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방에도 화장실에도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발생하는 바람소리에 놀라 몇 번이고 어깨를 흠칫했다.

루루와 오랜 기간 함께 했던 집이었음에도 이곳에는 삶의 흔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살다가 비운 집이 아니라 누군가가 살았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은 집 같았다.

현관 밖으로 나왔다. 하늘조차 정지한 것처럼 고요했다. 아까 본 뭉게구름들이 푸른 하늘에 그대로 붙박혀 있었다.

루루와 지냈을 때처럼 간이 화로에 장작을 쌓고 사이사이에 마른 낙엽을 넣고 불을 붙였다. 낙엽과 잔가지와 굵은 장작이 바통 터치하듯 순차적으로 불이 붙고 재가 되었다. 화로 옆에 놓인 부채를 들고 불이 안정화될 때까지 부채질과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모든 곳에 고르게 퍼져 있던 추위의 한 지점에 온기가 피어올랐다. 구구는 화로 가까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음소거 제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불똥이 튀어 오르며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딱히 손이 시린 것도 아니었는데 언 손이 녹는 기분이 든다. 끊임없이 장작을 넣어가며 불을 보고 있을 때 대문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구둣소리가 들렸다. 뾰족한 것이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는 소리. 아파트 현관문 너머로 익숙하게 들어왔던 소리. 발소리의 주인공은 대문을 열고 들어와 의자를 구구 옆에 끌어다 놓고 앉았다. 그녀는 구구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나란히 앉아 함께 불을 쫼 뿐이었다.


"커피를 좀 가져올게."


구구는 늘 그랬듯이 주방에 들어가 머그잔 두 개를 꺼내고 그 안에 인스턴트커피가루를 부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담고 전원버튼을 누르자 달궈진 쇳덩이에 물을 부었을 때 나는 증기소리가 났다. 커피포트에 담긴 물이 끓기도 전에 루루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곧 물이 끓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줘."


루루는 구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방까지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짚어넣었다. 이곳에서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루루의 유혹이었다. 성(性)적인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루틴에서 벗어난 그녀의 행동은 구구를 놀라게 만들었다. 루틴에 어긋난 루루의 행동은 그녀가 사라지기 전날 밤을 떠올리게 했다. 이곳에서도 그녀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그 손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녀의 손길은 구구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손길은 쇄골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꼽까지 내려온 뒤에 거두어졌다. 밖에서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잊지 말라고, 루루가 구구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인지도 몰랐다. 이때 이후로 루루가 예상 밖의 행동을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커피포트 속 물이 끓으며 플라스틱이 튕겨져 나오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루루는 커피 따윈 관심 없는 듯 자리를 떴다.

커피를 마시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 마트에서 물건을 가져와 저녁을 만들어 먹고, 아침이 되면 책을 보고, 어제 쓰고 남은 재료로 아침을 만들어 먹고, 모닥불을 쬐고, 커피 대신 홍차를 마시기도 하고, 종종 장작을 캐러 뒷산에 오르는 일상이 이어졌다. 필요한 것은 늘 가까이에 있었다. 이 안정을 함께 누려줄 소중한 사람도 곁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바깥의 기억은 점점 소실되었다. 무무도, 우도, 나중에 가서는 이곳의 루루와는 전혀 다른 루틴으로 생활했던 루루도 잊어버렸다. 누구의 감시도 없는 세상에서 구구는 심리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¹. 설국의 도입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를 오마주한 문장.





후기


어쩌다 여기까지 글을 쓰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영감을 얻은 것은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속 삼체인의 기술이 지구를 둘러 싸는 것에서 얻었습니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어떤 고차원적 존재의 습격'에서 사실은 우리가 우리를 습격하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한때 여러 언론에서 골목의 CCTV 설치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보도가 쏟아졌었습니다. 촘촘한 감시망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의견과 사회안전망으로써 기능하기 위해서는 더 설치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했습니다.

전자는 저처럼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방범과 사고 예방의 목적이라고 한들,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영상을 보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한들, 그것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습니다. 관리자가 마음만 먹으면 개인의 동선이나 생활패턴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았습니다.

후자는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 또 그들과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안전에 대해 걱정이 많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 또한 저나 제 주변 사람들이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범죄를 당했다고 한다면, 찬성했을지도 모릅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CCTV 설치 찬반이 격렬하게 이루어졌고 지금은 정말 촘촘하게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공공 카메라가 없는 곳도 개인용 카메라인 스마트폰과 차량용 블랙박스, 각 건물마다 설치된 사설 방범 카메라들이 촘촘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로 인해 범죄의 전이가 줄어들고 범죄의 억제력은 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감시도구들의 효용에 대해 회의적인 주장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방범 카메라 설치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감시되는 줄도 모르고 일어나는 범죄, 방범 카메라 설치 유무를 따지지 않는 계획범죄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도 합니다.

어느 쪽이 맞고 틀 리다를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 정답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전자의 의견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구구를 결국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곳, 완전한 무감시의 세상인 꿈 속으로 보냈습니다. 구구의 어떤 부분은 저를 동일시한 것도 있습니다. 감시로부터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은 부분이 대표적이지요.

감시받을 이유가 없는 인간이 된다면, 감시도구들은 모두 필요 없게 됩니다. 저는 구구가 그런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 부분에서 저와 구구의 다른 부분이군요(웃음). 그의 생활이 꿈속에서라도 온전히 자유로웠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소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단편 소설을 계속 쓰고 있습니다. 정리가 되는대로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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