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근주 Jun 27. 2024

안온한 관찰자

2. 숨겨진 책 관찰(1) - 갈증

 가끔 내가 선정해 놓고도 놀라우리만치 좋은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아멜리 노통브의 <갈증>이 바로 그런 책이었다.

 집안이 불교라 태생은 불교도였지만, 점차 과학이 제시하는 이성적 해결책에 매료되어 종교에서 발을 빼고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정한 게 10살도 채 되기 전의 일이다. 그 당시엔 어린아이들이 즐길 만한 놀이공간이라곤 언제 중학생들에게 돈을 뜯길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오락실과 아직 흡연구역이라는 개념이 없어 담배 연기로 자욱했던 초창기 PC방이 전부였던 때여서 놀이터에서 주로 놀곤 했었다.

 주말의 점심시간도 저녁시간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이면 놀이터 앞에 봉고차 한대가 종종 서곤 했었다. 젊은 누나나 아줌마가 차에서 내리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우리들에게 간식을 줄 테니 교회에 놀러 가지 않겠냐고 유혹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납치의 위험이 있는 아찔한 장면이지만, 그 당시엔 아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놀이터 선교활동이 흔하던 시기였다. 이미 봉고차에는 먼저 탑승한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어린 나이에 처음 들어가 본 교회는 압도적이었다. 강단에 올라서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설교를 하는 목사는 그 어느 어른보다 근엄했다. 성경의 내용을 하나도 몰랐지만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뉘앙스는 알아차렸다. 예배가 끝나면 우리가 들어왔던 출구에서 해맑은 표정의 형, 누나들이 초코파이와 요구르트를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간식의 유혹에서든, 자발적으로든 교회를 몇 번 나간 적이 있었지만 신앙심이 생긴 적은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과학이 제시하는 이성적 해결책에 매료되어 있었던지라 눈앞에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저 믿음을 강요하는 교회를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신앙심은 없다. 하지만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맹목적이지 않고 내 나름대로의 이성적 판단을 통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갈증> 또한 신앙심을 가진 이가 읽으면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다. 안온에 독서모임을 오시는 멤버 중에 기독교 신자분이 계시는데, 예수의 '십자가의 매달림' 사건을 소설화하여 그의 내면을 들여다본 것에 대해서 마뜩잖아하셨다.

 어떻게 보면 신성모독으로 오해받을 수 있음에도 작가는 자신에게 날아올 비난의 화살을 감수하고 이 책을 썼다. '갈증'이라는 단어로부터 예수의 '십자가의 매달림'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떠올려 결합해 소설이라는 작품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작가가 역량에 감탄했다.

 <갈증>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그것이 집행되고, 부활을 하기까지 예수의 입장에서 쓰인 이야기다.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우리의 시선은 늘 예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예수는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재판장에 선 예수. 그가 행한 기적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불만 가득한 거짓 증언을 늘어놓는다. 예수는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예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체념일까 아니면 그가 범인(凡人)이 아니기 때문일까. 결정론적 입장에 강제로 놓였음에도 정해진 미래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해내는 모습을 보면 예수가 확실히 보통은 아니지 싶다. 나였으면 배신감에 큰 분노를 표출했을 게 분명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은 그가 체헌 했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감각의 생생함, 그 생생함 때문에 찾아오는 극도의 고통과 갈증, 근원적 생리 욕구인 갈증이 해결되었을 때 느껴지는 쾌감을 아주 잘 표현한 것에 있다. 작가는 예수를 통해 우리의 '살아있음'은 무엇을 통해 강렬히 느낄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이 책은 예수를 모독하기 위해서도, 종교에 대한 회의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도 쓰인 것이 아님이 보인다. 물론 작가는 종교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책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종교적 논쟁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 '생의 강렬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 무엇인지 혹은 무엇의 결핍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엇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 책의 띠지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인생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는 방법은 태어나자마자 죽는 것이다'라고. <갈증>과 위의 띠지의 문구가 융합되어 인생은 효율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그 자체를 만끽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안온한 관찰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