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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없이 '나'도 '세계'도 존재할 수 없다.
아버지는 정확히 만 65세에 퇴직을 하셨다. 회사에서 특출 나지도 못나지도 않게, 그 어렵다는 적당히를 잘 해내신 분이셨다. 때가 되면 진급을 하셨고 때가 되면 호봉이 올랐다. 경제 위기 때마다 명예퇴직 얘기가 나와도 아버지는 해당사항이 없으셨다. 스물여덟에 들어갔던 회사에서 37년을 꽉 채우셨다. 정년퇴직인 60세 이후 5년의 정년 연장까지 성공하셨던 아버지가 지금 내 차 보조석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와 단 둘이서 여행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가족여행에도 낀 적이 없었다. 늘 일만 하셨다. 바쁘다는 말이 가족 누구보다도 가까웠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아버지와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무서웠다. 중고등학생 땐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빴다. 대학에 들어 가 첫 방학을 맞이했을 때 가족 모두 시간이 맞는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너희끼리 놀다 오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재밌게 놀다 오라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다발을 모두 꺼내 내게 쥐어주었다. 무려 삼십만 원이었다. 나는 갑자기 생긴 용돈에 기뻐하며 아버지가 남으려는 이유를 알기를 포기했다. 그때 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셨고, 가족여행쯤이야 언제든 다음에 다 같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아버지 나이가 쉰다섯이었고 건강에 아무런 문제도 없으셨기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무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만 흘렀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바쁘셨고, 나 또한 사회인에 가까워질수록 스스로를 신경 쓰기에 바빴다. 아마 아버지가 정년퇴직 후에도 정정하셨다면 아버지와의 여행은 기약 없이 밀렸을 것이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잘 아프지 않으셨다. 가끔 어디 부딪혀 멍이 들거나 생채기가 난 걸 본 적은 있었어도 흔한 감기 한 번 앓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은퇴 후 받은 건강검진에서 치매를 판정받았다. 자세한 검사는 종합 병원을 가보라고 해서 인근 가장 큰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아버지는 실어증을 동반한 초기 치매 증상이 있다는 결과를 받았다.
정밀 검사를 받기까지 며칠 동안 지켜본 아버지는 치매와는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치매 초기 증상인 '깜빡'하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의사를 붙잡고 몇 번이고 제대로 검사한 게 맞냐고 되물었고, 검사 결과지를 내밀며 오히려 증상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먼저 내보내고 내게 몇 마디를 더 건넸다. 의사의 말을 끝까지 들었을 때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가 그리 심각하냐?"
약을 짓고 나오는 순간까지 내내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내 어깨를 툭툭- 두 번 무심하게 두드렸다.
"이 나이 되면 원래 하나씩 잊어가는 거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잊게 된 것뿐이야. 걱정하지 마라."
그러면서 차를 세워둔 곳으로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곧게 편 허리, 벌어진 어깨, 힘 있는 걸음걸이. 저렇게 건강하신 분이 기억을 하나씩 잃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치매는 미래가 없는 병이라고 한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고, 오늘을 잃어가면서 조금씩 과거로 걸어가는 병. 그 과거 곳곳에 아버지와의 추억을 심어놓지 못했다는 것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남들처럼, 이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실 때 부모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 후회되었다.
아직 기억할 수 있을 때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이때였다. 나는 3년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모아 둔 월급과 퇴직금으로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버지를 조수석에 태운 채 차를 몰았다. 회사를 왜 그만두었냐고 다그치실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의외로 순순히 여행에 동행해 주셨다. 아버지는 이번 여행이 나와 함께하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본능적으로 느끼셨던 걸까. 어디를 가고 싶었냐고 묻자 아버지는 딱히 가고 싶은 곳은 없으니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가보자고 했다. 나도 딱히 생각해 둔 것은 없어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에 강을 끼고 글램핑 할 수 있는 숙소를 잡았다. 거기서 사흘을 머무르며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지낼 생각이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다니던 회사는 어땠는지,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와 같은 익숙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했던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였다. 차 안에는 정적을 가르는 가요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독성 있는 훅이 스피커를 뚫고 흘러나왔다.
"요즘은 이런 노래가 유행이냐?"
차에서 아버지가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것은 인기 여자 아이돌의 노래가 나오고 있을 때였다.
"별로면 다른 노래 틀까요?"
"아니다. 뭐라고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순 없는데 신나는구나."
아버지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우리는 인기 탑 100을 들으며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해가 지기 직전에 예약한 글램핑 숙소에 도착했다. 카운터 직원에게 예약내역을 말하니 안내사항이 적힌 종이와 함께 열쇠를 건네주었다. 열쇠에 붙은 작은 견출지에 105호라고 쓰여있었다.
남자 둘이서 하는 여행이라 그런지 짐은 별로 없었다. 일주일 정도 입을 수 있는 옷과 속옷, 기초화장품, 각종 충전기, 혹시나 해서 챙겨 온 책 한 권이 내 짐의 전부였고 아버지는 나보다 책이 두 권 더 많았다.
저녁은 글램핑 예약할 때 같이 예약한 바비큐 세트로 해결하기로 했다. 하루 전 급하게 예약했음에도 사장님은 친절하게 준비해 주셨다. 사장님은 시간에 맞춰 바비큐 그릴에 불이 붙은 숯을 넣고 그 위에 일회용 불판을 올려주셨다.
"나중에 모닥불 피우실 때 이거 쓰시면 됩니다."
사장님은 활성탄에 불을 붙일 때 쓴 토치를 장작 옆에 두고 가셨다. 내가 고기를 구우려 하는데 아버지가 고기 위에 올려진 집게를 먼저 잡아챘다.
"제가 구울게요."
"이런 건 잘 굽는 사람이 굽는 거다. 같이 먹을 거나 준비해라."
아버지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기에 시키는 대로 했다. 접시에 김치와 쌈채소들을 올려놓고 조금 기다리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알루미늄 포일 접시를 내밀었다. 그 위엔 적당히 잘 구워진 삼겹살 넉 점이 놓여 있었다.
"숯불에 삼겹살을 굽는 건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이것도 기술이야, 기술."
고기를 보며 감탄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으쓱해하셨다. 평소 보여주던 근엄하고 진지한 모습이 아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또래 남자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버지와 함께 무언가를 했던 기억 자체가 없었다. 내가 그나마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중학교 시절부터 되새겨보면 그 당시 나는 아버지와 함께 무얼 한다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했다. 친구들이 더 좋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멋있게 여길 때였다. 아버지는 무언가 같이 하자고 제안조차 한 적이 없었기에 나는 거의 자유로운 영혼처럼 바깥을 맴돌 수 있었고, 주말에 아버지를 따라 낚시나 교회에 끌려간다는 친구들은 그런 나를 부러워했다. 그때 나를 부러워했던 친구들을 이젠 내가 부러워한다. 비 내리는 강가에서 즐겼던 낚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와 먹었던 탕수육이 부러웠다. 내 기억 속엔 주말마다 담배 찌든 내가 가득한 PC방에 가서 친구들과 줄줄이 앉아 화면 속 적을 향해 '죽여!'라고 외친 것들 뿐이었다.
"아버지."
나는 상추에 삼겹살과 쌈장 찍은 마늘 한쪽을 싸서 고기 굽는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나는 알아서 먹을 테니까 먼저 먹어라."
말과 달리 아버지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한평생 아들이 싸주는 쌈을 먹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조금 더 가까이 손을 내밀었다. 고기를 굽던 집게를 잠시 멈추고 어색하게 쌈을 받아 드셨다. 싫진 않으신지 입가에 미소가 진다. 이게 뭐가 어렵다고 그동안 해오지 않았던 것일까. 고기를 구워 먹는 것, 쌈을 싸서 아버지의 입에 넣어드리는 것,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언젠가로 미뤄왔던 것.
두 번째 쌈부터는 거부감 없이 잘 받아 드셨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 보려고 나보고 쌈을 잘 싼다고 칭찬도 해주셨다. 잘 싸는 쌈이 어디있어요, 하고 내가 웃으며 받아쳤다. 아버지가 따라 웃었다. 저렇게 편안하게 웃는 모습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이날을, 이날의 웃음을 오래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이 소설이 먼저 완결까지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