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선희 Jun 03. 2022

I DON'T NEED THE RECEIPT

오늘도 세탁기 속에서 또 한 번 폭탄이 터지고 전쟁이 일어났다.

하얀색 잔해로 범벅이 된 세탁기 속. 그로 인해 몹쓸 지경이 된 빨래들. 조각조각 하얀색 종이가 빨래에 많이도 달라붙어있다.

이 정도면 세 장?

'누가 주머니 속에 영수증 안 빼고 옷을 세탁기에 넣었어?'

영수증의 출처를 찾아 젖은 빨래의 주머니 속을 일일이 뒤져보니 다름 아닌 바지의 주머니 속이었다.


나는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먹고 나서 꼭 영수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곳 싱가포르에서도 계산을 하고 나면 반드시 영수증을 챙겨준다.

가계부를 쓰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산 물건이, 내가 먹은 음식이 맞는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성격도 못되기 때문에  받아도 두 번 다시는 찾을 일이 없는 영수증. 그래서 결국 장바구니 속에 쌓이고, 주머니 속에 방치되어 가끔 내게 큰일을 만들어주는 영수증.

금액만 확인하고 그냥 안 받고 싶은데 근데

 I don't need the receipt 이란 문장은 왜 이렇게 타이밍에 맞게 튀어나와 주지  않는 건지. 

이번에는 꼭 타이밍을 맞춰보리라  다짐을 하고 계산대 앞에 서면  꼭 그 말이 한 발짝 늦게 튀어나와  이미 직원이 영수증을 내밀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리기 일쑤이다. 그래서 되려 더 뻘쭘한 광경이 만들어지고 또 머뭇거리며 영수증을 받아오고야 말고.

You're welcome  내겐 별반 다를 게 없다.

문을 잡아준 나에게  thank you라고 웃으며 말하는 외국인에게 나는 [별말씀을] 이란 대답으로 훈훈한 상황을 만들고 싶은데 꼭 다  지나가고 난 후에 you're welcome을 혼자 속삭이고 있다.


오늘도 빨래에 붙어있는 영수증의 잔해를 일일이 떼어내면서 '영수증은 안 받아도 되는데' 혼잣말로 툭툭 거리고 있는데 그걸 우연히 본 아들이 한마디 한다.

"아니. 엄마! 그럼 영수증 필요 없다고 얘기하면 되잖어."

"나도 알거든?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I don't need the receipt!!  근데 그 말이 잘 안 튀어나와서 그러는 거거든."

"그럼 영수증 주려고 하면 No 라고 하면 되잖아~"

맞다!! No가 있었지.

어디서나 다목적으로 쓸 수 있는 No! 그런 순간에 나는 No! 마저도 적재적소에서 툭툭 튀어나와 주지 않는구나! 싶었다.


나는 원인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니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언어는 자주 뱉어봐야 내 것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외국에 살면서 절실히 느낀 건  여기서도 영어를 쓸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저기 의지를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만들고 억지로라도 쓰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상 누구와 수 분 이상 영어로 대화할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영어 때문에 두려워서 추진하지 않았던 아들의 플레이 데이트를 큰맘 먹고 하기로 했다.

Uk에서 온 David를 초대할 예정이다.

그리고 지금 밀려오는 걱정들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또 걱정을 하고 있다.

'난 미국식 영어에 익숙해서 영국식 영어는 잘 못 알아들을 텐데 어쩌지?'








작가의 이전글 싱가포르를 선택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