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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Jun 07. 2022

고기를 잘 뒤집는 남자

20대 중반에 경상도 남자를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난 지금까지도 경상도 남자가 무뚝뚝함의 전형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다 사람 나름이고 그렇다고 해서 서울남자들이 모두 부드러운 것도 아닐 테니. 오히려 경상도 남자의 이미지를 그 무뚝뚝하다는 편견에 가둬두고 마치 무뚝뚝해야만 진짜 경상도 사나이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내가 만났던 그 남자는 정말 무뚝뚝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가부장적이기까지 했다. 셀프서비스 식당이나 커피숍에 가면 본인은 떡하니 자리에 앉아서 딱 한마디만 내게 던졌다.

" 갔다 와라."

화이트데이 때나 생일날 선물을 줄 때는  옛다 받아라는 식으로 던져 주었고 주고 나서는 항상 정점을 찍는 한마디를 남겼다.

"니는 나중에 나한테 선물 뭐해줄 데?" 또는   "이런 걸 왜 꼭 해야 하는지 모르겠데이. 다음부턴 그냥 좀 넘기자."


그렇게 만날 때마다 유쾌하지 못했고 늘 잦은 다툼과 짜증으로 범벅이 된 힘겨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던 중 어느 날 삼겹살집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그 집의 메인은 두꺼운 볏짚삼겹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나마 두꺼운 볏짚삼겹살이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젓가락과 숟가락을 챙겨주고, 물을 따라 앞에 놓아주고, 삼겹살을 불에 올려놓고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던 나는 눈짓으로 고기를 뒤집어달라는 신호를 하고 나서 자리를 떠나 밖에서 통화를 하고 들어왔다. 들어와서 불판을 보는 순간 정말 기가 차고 어이가 없게도 고기는 불판에서 그대로 타고 있었고 그 남자는 팔짱을 낀 채로 타고 있는 삼겹살을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 아니 왜 고기를 안 뒤집고 다 태워?"  한마디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더 기가 막혔다.

"고기는 여자가 뒤집어야지. 내는 여태껏 고깃집 가서 단 한 번도 고기를 뒤집어본 적이 없데이.근데 니는 뭐한다꼬 고기를 안 뒤집고 있었노"

"나는 통화하고 지금 들어왔잖아. 못 봤어?"

"니 고기 안 뒤집고 밖에 나가서 통화한 건 잘한 짓인가?"


그렇게 삼겹살집 사건으로 대판 싸운 우리는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서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다. 헤어지면서 그 남자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내는 정이 없는 사람이데이."

내가 받아쳤다. "정 없는 게 자랑이냐?"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누구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냥 표현방식일 수 있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일수도 있고, 또 그 남자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기념일만 챙겨주기 바라고 식당에선 고기도 안 뒤집고 밖에 나가서 통화만 하는 여자로 쳤을 수도 있으니. 우린 그냥 서로 너무 안 맞았던 건 .

내가 그 남자를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인 사람이라고 느꼈던 것도 우리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지친 나머지 유독 나한테만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고기를 뒤집지 않고 태우는 그 모습을 본 내가 받은 충격이 적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후로 몇 년 뒤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이런 말은 좀 우습지만 나는 남편의 고기 뒤집는 모습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 물론 그 결심이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 굳이 얘기하지 않으련다.


항상 어딜 가도 나를 챙기느라 바빴던 남편. 고깃집을 가면 일일이 다 구워주고, 잘라주고, 내 개인접시에까지 올려주는 완벽한 매너의 남편. 정말이지 그런 모습에 어찌 반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결혼을 하고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모습은 늘 한결같다. 오죽하면 남편 없이 친정식구들 고기를 먹으러 자리에서 엄마가 고기는 안 드시고 식사하는 내내 남편 얘기만 하신 적도 있었다.

"우리 박서방이 있었으면 다 구워주고 그랬을 텐데..."

"우리 박서방이 그런 거 참 잘하는데..."


9살짜리 늦둥이 아들도 남편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 유치원 다닐 때부터  늘 스윗하다 젠틀하다는 소릴 들었다. 아들은 아주 어릴 부터 항상 엄마 괜찮아? 엄마 어디 아파? 엄마 내가 허리 주물러줄까?라는 말을

참 자주 하는 아이였다.


한 번은 아들의 학교 친구 엄마들이랑 아이들을 데리고 다 같이 놀이동산에 간 적이 있었었는데 한껏 놀이기구도 타고 즐겁게 노는 중에  그중 한 여자 친구가 "아~ 다리 아파" 하면서 벤치에 턱 주저앉았다. 그걸 보고는 잽싸게 옆에 앉아 다리를 주물러 주는 아들의 모습을 본 내 눈엔 남편이 오버랩되었 순간 나를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엄마들은 다들 너무 놀라서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머!? 웬일이야. 웬일이야. 쟤는 완전 신사다. 너무 멋있어 언니. 언니는 좋겠다."

"애가 아빠 닮아서 그렇지 뭐"

분명 아들은 칭찬받아 마땅할 일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 줬어야 하는 건데 그게 막 칭찬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날 나는 남편에게 그 얘길 했다.

"애가 당신 닮아서 남들한테 너무 잘해.

아니 오늘은 여자애가 다리가 아프다니까 옆에 앉아 물러주더라니까."

남편은 웃으며

"그 정도까진 아닌데..." 하며 머쓱해했다.

"여보. 내가 당신이랑 결혼을 잠깐 망설 인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뭐였는지 알아?

당신이 너무 사람들한테 잘해서 내가 피곤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 나는 당신이 가정교육 잘 받아서 매너가 좋은 줄 알았거든. 근데 우리 아들 낳고 나서 키우면서 느끼는 건데 남한테 잘하는 것도 기질이더라. 타고나는 거. 그래도 당신은 남한테도 잘하고 나한테도 잘하니 다행인 거지 뭐"


지금으로 봐 선 아들도 고기를 잘 뒤집어주 남자로 성장하리라는 건 너무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참 사람의 마음이란 나는 남편의 고기 뒤집는 모습, 나를 잘 챙겨주는 그 모습에 반했으면서도 아들은 살짝 시크하게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


이제 여자 친구의 관점이 아닌 엄마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간사하게도 아빠처럼 고기를 잘 뒤집는 남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고기를 잘 뒤집어주는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들이 커서 내게 연애상담을 하는 날이 오면 나는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아들아,요즘엔 나쁜 남자가 인기가 더 많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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