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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Jul 05. 2022

한 번도 갑이 된 적이 없는 여자

3. 집주인이지만 또 을 입니다

결혼을 하고 세입자로 10여 년을 살아왔다.

그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나는 완벽한 을이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전세를 계약하고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집주인이 집을 내놓았다고 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동산에서 매수할 분들과 동행해서 집에 찾아왔다.

내 공간에 방문자가 잦은 건 당연히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난 을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전세 2년을 채우고 집을 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벽지가 누렇게 변색했다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나도 한마디는 할 수 있었다.

" 처음부터 이랬었어요."

하지만 내 얘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증명이 될만한 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꽤 많은 돈을 물고 전셋집을 나왔고 결혼 12년 차에

우리는 드디어 집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남편의 사업 확장이 운대를 잘 만나 재개발이 유력한 곳에 작은 빌라를 하나 더 살 수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세입자를 들이게 되었다.

세입자를 들이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전화가 왔다.

" 제가 요새 관절이 좀 안 좋은데 4층이라 계단 오르기가 너무 힘들어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그러시군요. 그럼  내놓고 나가시면 될 것 같아요. 저도 부동산에 내놓을게요."

그러고 나서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또 전화가 왔다.

"제가 다른 집을 구하려고 했는데 그게 어려워져서요. 그래서 그냥 살려고요."

"아~ 그러세요. 다행이네요. 알겠습니다."

그 후로 3개월쯤 뒤에 또 한 번의 연락이 왔다.

"제가 천식이 있는데요. 집 벽지에 곰팡이가 생겼거든요. 벽지를 새로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벽지공사를 새로 해주면서 생각했다.

예전에 내가 세입자였을 때는 내가 벽지값을 물었던 것 같은데...

부동산법을 잘 알지 못해 세입자의 요구가 맞는 건지, 아니면 내가 손해를 본 건지는 알 수가 없다.

단지 단 한마디 그 어떤 것도 묻지 못하고 세입자에게 질질 끌려다닌듯한 내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다.


집주인이 되면 당연히 갑이 될 줄 알았고 당당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나는 또 을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 세입자는 당당하게 요구할 건 요구하는 내가 늘 부러워하는 유형의 사람이구나!

내가 세입자의 요구를 거절했다면 그는 아마 깔끔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고, 안 되는 건 군소리 없이 포기했을게 분명하다.

그 무엇도 따지지 못하고 어리바리 요구를 다 들어줘놓고 뒤늦게 억울해하고 장렬한 뒤끝을 남기는 나란 인간에게 나는 또 실망을 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라면 너는 절대 갑이 될 수가 없어. 착하게 사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니?(그럼 내가 착하다는 건가?)

살짝 이기적이어도 괜찮아. 세상은 냉정하니까.'

늘 느끼는 바이지만 이론은 언제나 100점이다.

몰라서 못하는 건 배우면 된다지만 알면서도 못하는 게 문제라는데 그렇다면 나는 평생 이렇게 을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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