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치라는 이유 만으로

by 김선희

불콰해진 얼굴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내 앞에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앉아있는 고교동창생 S는 벌써 몇 시간째 추억을 뒤적거리고 있다. 하필 꺼내기 싫은 단면을 끄집어내려 하고 있다. 그녀가 서두를 들이밀자마자 나는 화제를 돌려보려 궁금하지도 않은 그녀의 남편 안부를 묻는다. 그냥저냥, 이라는 단답형의 대답을 서둘러 던진 S는 다시 방향을 틀어 얄궂게 그 얘길 들먹인다. 소주가 쓰고 아리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주점 안에 울려 퍼지는 노래 탓이다. F.R David - Words. 고등학교 체육대회를 앞두고 우린 그 음악에 맞춰 군무를 연습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름 키도 크고 늘씬한 친구들만 차출되었다. 거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군무를 지도하는 사람은 발레를 하는 선배였다. 긴 팔다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선배는 순둥순둥한 인상이었으나 군무를 지도할 때만큼은 매섭고 차가웠다. 나는 중학교 체육대회 군무에서 잘린 적이 있었다. 그때도 키가 크다고 뽑혀서 참여하게 되었는데 몸치라는 게 금세 드러났다. 당시 군무를 지도하던 사람은 우리 반 반장이었다. 그녀가 눈꼬리를 올리며 내게 다가왔다.

"넌 안 되겠어."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그땐 그게 전부라고 여겨졌었다.


다신 수치스러움을 감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만큼 열심히 했다. 내 모습을 볼순 없었지만 그만하면 잘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체육대회 때 남학생들 앞에서 우아한 춤선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설레는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연습이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연습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선배가 자리배정 투표를 하자고 했다. 이십 명 정도가 연습하고 있었는데 모두에게 지령이 내려졌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번호를 붙여 이름을 종이에 써내라고 했다. 열심히 했으니 결과도 따라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투표를 통해 결정된 내 자리는 맨 뒤에 끄트머리였다. 쟤는 제일 못해서 저 자리에 배정되었구나,를 누구나 알아차릴 것 같았다.

화가 치밀었다. 차라리 관두자는 마음이 세찬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나는 연습 중에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절로 스르르 풀렸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영문을 모르는 선배와 친구들이 연습을 하다가 멈춰서 당황스레 날 보았고, 난 그대로 머리를 짚으며 아픈 척을 했다. 실제로 얼굴까지 파리해져서 급체라도 한 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펑펑 울면서 연습에서 빠지게 되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연습에 나가지 않았지만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다.

체육대회 당일날, 군무는 나 없이, 아니 처음부터 나란 존재는 없었다는 듯이 무척이나 얄밉게 잘 진행되었다.


우린 젖어있었던 것 같다. 잘하고 못하고를 구분하고, 서열을 나누는 것에 꼬릿 하게 절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체육대회 아닌가, 춤을 잘 추는 친구들, 그렇지 못한 친구들이 한데 어우러서 화합하는 모습, 공부에 해방되어 전교생이 즐거워야 하는 축제, 체육대회의 취지는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아직도 F.R David - Words를 듣지 못한다. 그 음악이 나오면 움찔움찔 놀라고 힘을 줘서 눈을 감는다. 그러니까 그건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것이다.

S가 술잔을 들어 건배를 청한다. 나는 술잔을 들지 않는다. 지금 흘러나오는 이 노래, Words가 빨리 끝나길 바라며, S가 그 사건을 오늘은 잊어주길 바라며 일부러 안주를 오래 씹는다. 침에 불려진 먹태조각이 질겅질겅 씹히고 또 씹힌다. 어금니가 욱신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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