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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희 Jan 09. 2023

보일러를 올리셔야 합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안 그래?

라 모르겠다 올겨울 한번 따뜻하게 지내보자 하고 보일러를 펑펑 돌렸지 뭐야. 그랬더니 한 45만 원 나오더라고. "

깔깔깔

"맞다니까.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나도 이제부터 펑펑 좀 틀어볼까 봐. 죽어서 돈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니고..."

깔깔깔

찜질방 한 귀퉁이에 앉아서 달콤한 수다를 즐기고 계신 두 어르신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내가 얼굴만 두꺼웠더라도  그 대화에 끼어들어 맞장구를 치고 싶었.  이런 얘기도 곁들이면서...

"맞아요. 맞아. 저희 아빠도 겨울에 보일러만큼은 아끼지 말고 따뜻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는데 갈 때마다 집이 추워서 늘 걱정이에요.

그래도 나름 생활비 넉넉하게 드리고 있는데도 그러시네요."


아침을 먹고 소파에 앉아있는데 아빠 친구분께 전화가 왔다.

"선희야. 오늘 아빠목소리가 이상해. 너 좀 집에 빨리 가봐라."

순간 손이 떨리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증상에 단축번호 누르는 것도 버거웠다.

헤매다가 겨우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분 말씀처럼 아빠는 어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 "아빠. 목소리가 왜 그래? 응?"

- "풍이..."

- "응? 뭐라고?"

- "풍이 온 것 같아."

- "뭐? 풍이 왔다고?"

119에 전화를 했다.

"... 친정에 아빠 혼자 계시는데 지금 풍이 와서 쓰러지신 것 같아요. 제가 가는데 30분 정도 걸리니까 출동 좀 부탁드립니다." ( 물론 이렇게 깔끔하게 얘기하진 못했다.)


아빠에게 달려가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보일러였다.

예전부터 어디선가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시골에서 아무개 씨가 추운 데서 자다가 입이 돌아갔다고.

그렇게 보일러 아끼느라 안 트시더니 결국 추운 방에서 아빠도 그리 되셨구나 싶었다.

차 안에서 엉엉 울면서 친정과 먼 거리에 살고 있는 나를 원망했다.


그렇게 한 10분쯤 가고 있었을까?

119에서 전화가 왔다.

"119인데요. 지금 어르신댁에 와서 체크했거든요."

"네. 네 어떻게 되셨나요?"

"네. 그게...

건강에 특별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고요. 어르신 말씀으로는 밤에 잠이 안 오셔서 꼴딱 세우시다 아침나절에 잠에 취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으셨던 거랍니다."

"네? 풍이 아니고요?"

"네.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와보시고 평소랑 다른 것 같으시면 다시 119에 신고해 주십시오."

"... 네. 감사합니다."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고 나서 끊으려는 순간 성급히 말꼬리를 붙잡고 구급대원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아. 잠깐만요.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집에 보일러 좀 올려 주세요."

"아. 네.. 도착해 보니 방 안이 추워서 이미 올려놨습니다."


아빠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아빠. 제발 보일러 좀 올려요. 이런 날씨에 정말 큰일 나."

"아이고. 난 더우면 답답해서..."

 "그래도 이젠 연세 드셔서 이렇게 춥게 지내면 안 된다니까. 내가 생활비 더 드릴게."

"알았다. 알았어."

마지못해 하시는 대답 같아 여전히 걱정은 가시질 않는다.

"근데 아까 나랑 통화에서 풍이 왔다고 하지 않으셨어?"

"내가? 아니...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이상하다. 분명히 풍이 온 것 같다고 하신 것 같은데.."

하긴 정말 풍이 와서 쓰러지셨다면 어떻게 본인 입으로 풍이 온 것 같다고 말씀하실 수가 있을까 싶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던 걱정들그 순간에 말을 만들어버린 것 같다.


- "아빠. 우리 집에서 같이 사실까?"

- "내가 미쳤냐? 싫어."

- "그럼 cctv라도 설치할까?"

- "그건 사생활 침해지."

- "그럼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라도 일주일에 한 두어 번 불러 드릴까?"

- "난 누가 집에 와서 내 살림 건드리는 거 싫어."

- "앞으로 보일러는 돌리실 거지?"

- "그건 생각해 볼게."


오늘 아빠에게서 문자가 왔다.

[자고 있을 수 있으니까 오전 10시 이전에는 전화하지 말아라.]

세월이 가도 무뚝뚝함이 한결같으신 아빠.

전화를 하면 대답이 없으셔서 늘 나 혼자 떠들다가 끊고는 한다.

그럼에도 절대 굴하지 말고 보일러 좀 올리라는 잔소리하나는  보태야겠다.

"아빠. 보일러 좀 올려요. 추운 데서 자면 입 돌아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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