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백수가 본 영국 의료 시스템 붕괴의 그늘
전화벨이 울리면 헤드셋을 낀 직원이 응대합니다. "엠뷸런스 서비스입니다. 환자가 숨을 쉽니까?" 환자는 고통을 호소하지만 당장 보내줄 구급차가 없습니다.
구급차가 없다기보다,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이 없습니다. 구급대원들은 환자를 태우고 응급실 앞에 도착하고도 병상이 비기를 기다리고, 집에서 거리에서 환자들은 구급차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1시간 반을 기다린 환자는 다시 전화를 걸지만 더 기다리라는 말 뿐입니다. 막막한 환자는 허탈하게 묻습니다. "대체 언제 온다는 겁니까? 내일 아침에요?"
bbc one(이 방송에는 TV 채널이 4개입니다) 프로그램 중에 ambulance가 있습니다. 2016년에 첫 방송이 전파를 탔고(이 표현도 진부하군요 이젠. 저도 iplayer로 이 프로그램을 봅니다) 최근에는 12번째 시즌이 방송된 장수 프로그램입니다. 한국으로 치면 다큐3일 119 구급대편이 KBS 1TV에 매주 정규편성된다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구조구급 요청을 받는 콜센터(지령실 또는 상황실이 더 정확한 표현일까요?)부터 현장의 구급대원들, 이들이 맞닥뜨리는 온갖 사건 사고 현장과 환자들의 모습들, 후일담까지를 담는 프로그램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대기자들의 수입니다. 위성사진 위에 구조 요청이 들어온 위치와 구급차들 위치가 표시됩니다. 과장도 미화도 없이 bbc는 어느 새벽 멘체스터 지역에 환자들이 길게는 몇 시간씩 구급차를 기다리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지역 내 구급 상황 대응 역량이 모두 소진되면 때로는 인근 지역의 구급차에 출동 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가까운 다른 도시라고 상황이 나을 리 없습니다. 영국의 구조구급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의료 시스템이 거의 붕괴 상태입니다.
무료 보편적 접근이 가능한 의료 시스템, 하지만 신뢰는 이미 무너져 있습니다. 환자들은 너무 오래 기다립니다.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 수가 775만 명입니다. 영국 전체가 아니라 잉글랜드 지역에서만 이 정도 규모입니다.
1년 넘게 대기하는 환자만 30만 명이 넘습니다. 가벼운 질환 만이 아니라 고관절 수술이나 종양 제거 수술마저 너무 오래 지체되고 있습니다. 고령이거나 기저질환이 있는 고위험군 환자라면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기다리다 죽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보수당 집권기에 두드러진 건강보험 정책 실패가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입니다. 아래 자료는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분은 굳이 열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섬네일에 있는 그래프만 봐도 주장의 취지는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보수당 집권기, 파란 선 기간 동안 대기자 수가 급증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https://www.helenadollimore.com/post/helena-slams-the-government-s-poor-record-on-nhs-waiting-times
의료 시스템 붕괴로 직격탄을 맞는 것은 중산층 이하 서민들입니다. 고소득층은 망가진 공짜 병원에 더이상 가지 않습니다. 값비싼 사설 병원 시스템은 오히려 진화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건강 불평등' 아니 '생명 불평등' '죽음 불평등'입니다. 상위 10% 기대수명은 68세, 하위 10%는 57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다가 10년 일찍 죽는 셈입니다. 꼭 의료 문제 때문만은 물론 아니라 해도 말이죠.
부자가 68세까지밖에 못 산다고? 평균이라 그렇습니다. 부자도 사고를 당하는 등의 이유로 일찍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느냐. 당연히 돈입니다. 영국은 보건 의료 분야에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규모보다 적게 투자하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의료 질 저하가 이젠 만성이 됐습니다.
모든 게 부족해지겠죠? 2021년 기준으로 인구 천 명당 병상 수는 한국이 12.77개로 가장 많았습니다. 영국은 2.42개였습니다. 병상이 최근 30년 사이에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병상이 부족하니까 입원을 하려고 해도 자리가 부족하겠죠. 병상 가동률은 평균 80%가 넘습니다.
환자가 줄을 서 있고 일은 밀려 있는데 영국 보건의료 서비스 분야에서는 희한하게 일 할수록 가난해집니다. 위 그래프는 보건의료 종사자들의 실질 임금을 2010년을 기준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팬데믹 기간에 일시적으로 상승할 뿐 추세적으로 실질임금이 줄어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직종에 따라 10년 사이에 실질임금이 10% 가량 줄어들기도 했군요.
당연히 NHS을 떠나는 직원들이 줄을 이으면서 인력난이 심화됩니다. 필요 인력보다 12만 명 넘게 부족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환자들은 기다리는데 직원들은 지쳐 나가 떨어지는 셈입니다. 그럼 환자가 병원에 가기 더 어려워집니다. 전형적인 악순환입니다.
의사마저 부족합니다. 국민 건강을 최일선에서 지키는 일반의, GP들이 병원 문을 닫고 있습니다. 조사를 보면 하루 평균 11시간 동안 37명을 진료합니다. 한국 기준으로는 대단치 않은 숫자인데, 영국에서는 '안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라고 인식합니다.
격무에 시달리는데 보상은 충분치 않습니다. 2010년 이후 GP들의 실질임금이 줄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영국 의사단체의 주장이 아니라 OECD 공식 통계입니다. 전문의가 1.2%, 일반의는 0.8% 실질임금이 줄었습니다. 네, 전문의의 실질임금 하락폭이 더 큽니다. 자유낙하하는 다른 직종에 비해서는 그나마 나은 셈이라 위 그래프에서는 뺐나 봅니다. 이 와중에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비대면으로 환자들을 진료하고 상담한 노고에 대한 저평가가 이어졌습니다.
그 누가 왜 무엇을 위해 버티겠습니까? 2015년 이후 GP의 이탈이 지속되고 있으니, 이 정도면 심각한 고질병입니다. 영국 의사 면허가 있다면 어느 나라엔들 가서 의료 행위를 못할 리가 없습니다. 영어로 진료하고 상담할 수 있으니까요.
영국에선 의사 뽑을 때 인성 시험을 본다고 했던가 그런 인터뷰 기사 제목을 한국 언론에서 봤습니다만,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탈출하는 건 인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국에선 아프면 약국에 가서 진통제를 먹고 버티거나, 더이상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을 때에야 겨우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야 하는 형편입니다. 아 물론 이건 보통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돈이 많다면 그냥 프라이빗 병원에 가서, 혹은 전문의를 집으로 불러서 편하게 진료를 받으면 됩니다. 특히 건강 문제에서는 영국이 '완전한 신분제 사회'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 같습니다.
한국 의료 시스템의 미래가 이런 그림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수도권 응급실마저 위태롭다는 기사들을 보았습니다. 영국에서 백수로 살다 보니 병원조차 필요할 때 갈 수 없는 처지가 얼마나 불안한지 매일 뼈저리게 느낍니다. 서울에서는 감기 기운에 목만 좀 칼칼해도 '쓰레빠'(네 저는 이 어감을 포기 못 하겠습니다. 따옴표를 칠 테니 용서해주세요) 끌고 가서 조금만 기다리면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잖아요. 의원급 진료비는 1,500원이었던가요?
진짜 각자도생 사회가 되면 권력자와 부자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열릴지도 모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지옥도가 되더라도요. 부디, 당분간, 무탈하길 빌겠습니다. 런던에 있는 백수도, 한국에 있는 여러분도, 모두.
저희 가족이 런던에 도착한 뒤에 실제로 겪은 일이 있어서 지금 한국의 의료 상황에 더 마음이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