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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Aug 30. 2024

오페라에 눈을 뜨다, 프로밍으로

자발적 한시적 백수의 런던 표류기

확실히 알았다. 그동안 내가 오페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은 좋은 자리에서 생생하게 즐기지 못한 탓이었다. 오페라가 이렇게 재미 있구나. 무대 바로 앞 넷째 줄에 170분간 서서(!) 본 오페라는 기대 이상이었다. 다른 모든 공연도 그렇겠지만 오페라는 좋은 자리에서 봐야 하나보다. 


프로밍(promming)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2024년 8월 29일 prom 52는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이었다. 그간 오페라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프로밍으로 감상하면 좀 다르지 않을까 하여. 가능하면 무대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따님의 성화로 오늘은 프로밍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모두 경험했다. 다른 분들도 이렇게 하시면 되겠다 싶어 꼼꼼히 기록한다.


프로밍 정보는 이전 글도 한번 보시면 이해가 쉽다.

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9


먼저 오후 1시쯤 로열알버트홀에 직접 가서 표를 샀다. 3장 24파운드. 오늘 우리가 받은 번호표는 307번부터 309번까지. 너무 뒷번호인가 했으나 오늘 대기 번호표는 200번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아레나 중간에 모니터를 세우느라 공간을 비워야 했다나. 우리 앞 100명이 다 오지는 않을 수 있으니 무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겠다. 만세.


공연 1시간 10분 전, 5시 20분에 공연장에 도착했다. 1번 출입구 앞에 줄은 두 개. 직원에게 어떤 게 아레나 줄이냐 물어서 찾아갔다. 줄 선 사람들에게 "너 몇 번이니" 물으려다가 마침 낯익은 알버트홀 직원이 보이기에(이젠 제법 프로밍 구력이 쌓이는 중!) 번호표를 보여줬다. 이 분이 친절하게도 우리 대신 자리를 찾아줬다.


이젠 낯익은 프롬스 팬들이 보인다. 귀여운 영국 할머니는 오늘도 발랄했고, 늘 락앤락에 샌드위치를 싸오시던 할아버지는 여전했다. 로열 에어포스 티셔츠를 입은 할아버지도 늘 보던 그 모습 그대로 우리 바로 뒤에 섰다. 모자에 희한한 장식을 잔뜩 한,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할아버지는 시선 강탈! 샴페인 병을 따서 플라스틱 잔에 나눠 따르던 할머니들도 공연을 즐기셨기를.


영국 공군 티셔츠 할아버지와 어떤 공연이 가장 좋았느냐, 우린 임윤찬이 좋았다, 나도 그런 엄청난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같은 공연 감상평도 더듬더듬 주고 받았다. 오늘이 52번째 프롬인데 딱 한 번 빼고 모두 다 보셨다고. 대단하다! 또 당신 그래서 퇴역 공군인 거냐, 그렇다 오랫동안 복무했다, 실제 전쟁에도 나갔냐, 이라크 또 뭐 어디 중동 곳곳에 갔었지, 와 대단하다 같은 빅토크까지 절반만 알아들으며 서 있다 보니 입장 시간.


5시 반부터 입장. 들어가서 한 시간을 아레나 바닥에 앉아 기다리며 이른 저녁을 먹는다. 오늘 저녁은 런던 어디에나 있는 음식점 와사비에서 공수. 일본식 마끼와 치킨을 주워먹었다. 마실 거리는 미리 홀푸드에서 사 둔 화이트 와인. 6파운드 정도 하는 하프 보틀 한 병으로 적당히 기분이 좋았다. 알버트홀에서 사마셔도 물론 좋지만 한 잔에 7파운드 쯤 하니까 이렇게 싸 오는 게 경제적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다들 가방에서 주섬주섬 먹을 거리 마실 거리를 꺼낸다. 물론 못 챙겨온 분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은 견뎌야 한다.


"개와 늑대는 오래 친구로 남을 수 없는 법이야"

2막 집시의 노래에서 카르멘 역을 맡은 튀니지계 캐나다인 메조소프라노 카이에브가 노래한 가사다. 저 대사에 카르멘의 모든 이야기가 녹아 있다. 충직하고 효심도 깊은 군인 호세와 자유로운 영혼 카르멘의 비극적인 사랑이 극의 뼈대를 이룬다. 앞길 창창한 군인 신분이었다가 사랑에 눈 먼 호세는 2막 말미에 상관을 칼로 살해한다. 4막에서는 투우사 에스까미오의 여자가 되어 끝끝내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카르멘까지 목졸라 죽이고 만다.


비제가 원작 동명의 소설을 오페라로 각색하던 1870년대에야 퇴폐적이고 급진적인 내용이었겠으나 지금이야 뭐. 카르멘이 자꾸 '자유'를 부르짖을 때는 저게 뭐 대단한 자유라고 저리 목을 매나 싶었다. 어쩔 수 없이 아웃오브데이트한 이야기랄까. 퇴폐적일 것도 뭐가 있나. 미성년자 천지인 아이돌들의 현란한 안무에 비하면 양반이다. 


새삼스럽게 사랑의 의미에 대해, 신의를 지킨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잠시잠깐 해보게 됐다. 김광석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고 했지만 카르멘의 '너무 짧은 사랑'은 사랑일까 아닐까. 카르멘이 차갑게 식어버려서 호세가 준 반지를 내던지기 전, 2막의 선술집 장면에서는 분명 '나의 사랑은 돈 호세'라고 카르멘답지 않게 선언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공연을 보고 나온 10살짜리는 "그래서 그 군인은 착한 사람이야? 투우사는 착한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야"를 시전했지만.


귀에 익은 음악들 배우들의 호연

무엇보다 음악이 좋았다. 아마도 귀에 익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투우사의 노래, 하바네라, 꽃의 노래 같은 곡들은 오페라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제목까지 들어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 분들도 전주만 들으면 무릎을 탁 칠 만하다.


특히 오늘 공연은 런던필이 탄탄하게 무대를 떠받쳤다. 현악기도 타악기도 금관도 목관도 어느 소리 하나 모자라지도 튀거나 넘치지도 않는 좋은 소리로 세 시간 가까이를 달렸다. 심지어 지휘자의 등장부터 멋있었다. 지휘자 안야 빌마이어는 재킷 깃과 신발에 빨간색 포인트를 줬다. 정열적인 집시 카르멘 공연을 지휘하면서 이렇게 멋스럽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남성지휘자였으면 늘 그렇듯 턱시도를 입고 검정구두를 신었겠다 싶어서 더 맞춤이다 생각했다.


카르멘도 돈호세도 물론 멋있었지만 프라스키타 역을 열연한 엘리자베스 보드롤트(Elisabeth Boudreault. 한국어 표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가 공연 내내 눈에 띄었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뿜어져 나오는지 경이로웠다. 거구의 남성 배우 옆에 서면 언뜻 아역인가 싶을 정도였는데 꽤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을 당당히 해내는 모습이 대단했다. 찾아보니 이미 캐나다에선 꽤 유명한 분인 듯(나만 몰랐을 수도). 승승장구하시길 바란다.


큰 호응을 받은 미카엘라의 노래

오늘 커튼콜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은 건 타이틀롤인 카르멘도 돈 호세도 아닌 미카엘라.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에게로 돈호세를 이끄는, 악마와도 같은 카르멘의 속삭임에 넘어가 타락하는 돈 호세를 구원하려는 시골 처녀다.


미카엘라가 3막에서 부른 노래 '이젠 두렵지 않아'는 감동적이었다. 카르멘에게 맞서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실은 두려움에 떨고, 그러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겠다는 독백을 노래하는 장면이었다. 때묻지 않은 순수함, 그 무해한 아름다움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을까? 자기 안의 나약함, 그러나 이겨내고 싶은 용기가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미카엘라는 대천사 미카엘의 여성형이다. 기독교에서 미카엘은 병든 자들의 수호천사이자 최후 심판의 날 인간의 영혼을 저울에 다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여긴다. 미카엘라는 선한 여성의 얼굴을 하고 두려움에 떨며 노래했지만 실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이자 심판자인 셈이다. 흑인 소프라노 자나이 브루거에게 이 역할을 맡긴 것에도 분명 어떤 의도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현대 무용에 가까운 격렬하고 힘찬 안무가 추가된 새롭고 힘찬 무대 연출도 시선을 끌었다. 클래시컬하기보다는 웨스트엔드의 뮤지컬과 비슷한 느낌이었달까. 의상부터가 전형적인 집시 풍의 빨간 드레스가 아니었고 그냥 요즘 옷들이었다. 전통적인 오페라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서 덜 지루하고 몰입도가 높았을 수도. 물론 프롬스의 특성상 악단과 배우들이 한 무대에 함께 올라야 하기 때문에 무대 연출은 다를 수밖에 없기도 하다. 빨간색 포인트는 지휘자 차지.


프롬스 덕에, 정확히는 프로밍으로 아주 가까이서 본 덕분에 오페라에 눈을 떴다. 큰일이다. 앞으론 S석에서 오페라를 봐야 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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