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백수가 직접 겪은 의료 붕괴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가족 이야기입니다. 12월 말에 런던에 도착한 뒤 험난한 과정을 거쳐 냉장고를 설치하고 쥐가 나오지 않도록 방역을 마무리하고 '이제 적응은 끝났다'고 막 한숨 돌리는 참이었습니다. 런던은 아직 겨울인 3월 초부터 아이는 어지럼증을 호소했습니다.
처음엔 좀 피곤한가 했지만 아이는 축 늘어지곤 했습니다. 땅이 빙빙 도는 것 같다면서 힘들어했어요. 잠깐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증상이 오래 갔습니다. 길게는 몇 시간동안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거의 매일요.
그러잖아도 춥고 어둡고 축축하고 외로운 런던에서 아이까지 힘들어하니까 하루하루가 쉽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가족이 아프다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더구나 아이가 아프다니요.
무력감 고립감이 갈수록 커지면서 점점 걱정이 됐죠. 적응 스트레스, 학업 스트레스인지, 한국과 영국의 환경 차이 때문인지, 심지어 어떤 심각한 기저질환이 이런 증상으로 나타나는 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사립초등학교 입학 허가를 기반으로 2년짜리 학생 비자를 받았습니다. 비자 받을 때 적지 않은 보험료를 내고 건강보험도 들었죠. 그래도 병원에 가자는 말이 쉽게 안 나왔습니다. 영국 병원 가기도 어렵고 가봐야 도움이 안 될 거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은 탓입니다. 가난하면 10년 일찍 죽는 나라, 의료체계가 붕괴된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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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부부는 즉각 네트워크를 가동했습니다. 한국 전문의 친구와 직장 동료 등에게 두루 자문을 구했습니다. 한국 의사들은 대체로 큰 문제는 아닐 거라고 전제했습니다. 성장기 아이들이 종종 두통이나 어지럼증, 근육통이나 관절 통증, 복통 등을 호소하지만 대개 별 문제 없이 지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전문의 진료를 받아보라고 예외 없이 권고했습니다. CT나 MRI같은 정밀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도 했습니다. 확인은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증상이 반복된다는 점, 증상이 나타나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점, 증상이 일단 나타나면 지속 시간이 상당하다는 점은 주의해야 할 요소였죠.
문제는 역시 저희가 런던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당연하고 그리 어렵고 복잡할 것도 없는 절차가 너무너무 어렵고 심지어 비싸지는.
등록해둔 GP에 연락했습니다. 동네 의원 격인데, 가까운 병원에 근무하는 일반의를 주치의로 지정해놓는 개념으로 보면 됩니다. 영국의 의료 전달 체계는 일단 GP에서 보기에 정밀검진 혹은 입원 치료가 필요해야 상급 병원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료가 잡히지를 않습니다. 마냥 기다리라고 합니다. 심지어 전화응대를 하는 접수 직원은 매우 고압적입니다. 아내는 병원에 직접 갔다가 접수 직원의 표정과 말투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영어 짧은 우리 같은 외국인만 이런 경험을 하는 게 아닙니다. 구글지도에서 가까운 GP를 검색해보면 평점 2를 넘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음식점 고를때는 평점 4.5 아래로는 안 가는데 2점 넘는 병원이 드문 거죠. 후기들을 보면 100이면 100, 접수 직원에 대한 불만들입니다. 우리가 고른다고 고른 곳은 그나마 평점 2는 넘는 곳이었는데도 그 지경이었어요.
영국인과 결혼해 사는 처형도 심한 감기에 걸렸는데 진료조차 받을 수가 없다며 눈물을 쏟았다고 했습니다. 심각한 진료 적체, 업무 과다로 인한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영국 의료 체계에서는 일상입니다. 암 환자도 하염없이 수술을 기다린다는 판이니까요.
온갖 검색과 상담 끝에 우리는 A&E(Accident and Emergency department), 응급의료센터에 직접 진료를 요청했습니다. 응급실을 통해 바로 입원하거나 상급병원 외래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했죠.
콜센터에는 심지어 한국인 통역도 있더군요. 통화 끝에 콜센터에서는 응급실로 가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수긍했습니다. 중증 외상을 입었거나 생명이 위험한 질병을 앓고 있다고 당장 의심할 상황은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GP 진료를 바로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했어요. 이게 어디입니까. 진료를 못 받고 기다리다 죽을 지경이라는 영국에서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성과였습니다.
바로 다음날이었던가요. GP 선생님이 전화 연락을 해왔습니다. 비대면 문진 끝에 우리는 상급병원 진료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접수 직원과는 달리 친절하고 전문성 있는 선생님은 흔쾌히 곧바로 절차를 밟아 줬습니다.
2차 병원에 간 건 3월 19일. 영국 의료 현실에서 2차 병원까지 한 달 안에 들어간 게 이례적일 겁니다. 환자가 어린이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은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정말 예민하고 따뜻합니다.
매우 친절한 선생님은 문진 뒤에 진료를 했습니다. 눈을 감고 두 팔을 양옆으로 편 다음 한 다리를 들고 서 있어보라. 선생님이 손가락을 움직일테니 머리는 움직이지 말고 눈으로만 따라와 보라 등등. 그러더니 별 이상이 없다면서 정밀검사도 불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GP로 보낼테니 추적 관찰을 하다가 증상이 심각해지거나 하면 오라나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별 이상이 없다니 다행스러우면서도 허무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아이가 나아지기만 하면 좋으련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습니다. 안심이 안 됩니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합니다. 증상이 심화되거나 오랜 기간 지속되면 그 자체로 정밀검사 필요성이 커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의료접근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기껏 상급병원에 간다고 갔는데도 정밀 검사는 왜 해 주지 않는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얼마나 더 아파야 하는가.
다시 시간은 가고, 아이는 여전히 하교하면 침대로 직행했습니다. 답답해진 우리는 차라리 한국으로 가야 하나 생각하며 항공권을 검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이가 여전히 땅이 빙빙 돈다며 침대에 드러눕던 나날, 구원의 동앗줄이 내려왔습니다. 아이 학교에서 늘 우리에게 친절을 배풀던 캐나다 출신 학부형 C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집 아이도 비슷한 증상을 겪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프라이빗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만족했다고요. NHS 체계 밖에 있는 병원을 말합니다.
GP는 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기대할 수 없다고요. 그래 맞아, 우리도 이미 느꼈어. 하긴 아이가 다니는 캔싱턴 사립학교의 부유한 친구들은 그 누구도 GP에서 하염없이 진료를 기다릴 것 같지는 않죠.
전화번호를 받아서 연락했더니 거의 곧바로 예약이 잡혔습니다. 진료일은 4월 10일. 지름길을 찾아서 2차 병원 진료를 받은 날로부터 다시 3주 가량이 흐른 뒤네요. 그 사이에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고 부모는 또 부모대로 얼마나 속이 탔겠습니까?
중년의 백인 전문의 J 선생님이 꼬박 1시간 동안 여러 진료를 하더군요. 그래봐야 문진과 상담, 간단한 진료들이긴 했지만요. 그래도 안락하고 여유 있는 진료실에서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J 선생님 역시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만에 하나를 생각해서 뇌CT를 찍어볼 필요는 없겠느냐'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다'면서도 '원하면 촬영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록을 한국의 전문의들에게 보내서 교차 판독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도 했습니다.
빠르고 섬세하고 길고 친절한 진료의 대가는? 물론 비쌉니다. 초진료 250파운드였습니다. 한국에서 이 돈이면 CT도 찍으려나요? 한국 동네 의원에선 전문의 진찰료 중 환자 자부담이 아마 1,500원일 겁니다.
재진료는 회당 200파운드, 왕진을 온다면 300파운드를 청구합니다. 전화 자문만 해도 회당 40파운드를 내야 합니다. 전화 자문은 물론 초진을 대면 진료로 한 뒤에만 가능합니다.
런던에서 사설병원을 통해 CT나 MRI 촬영을 하면 400~800파운드, 많게는 1,500파운드 정도 든다고 했습니다. 촬영 비용만요. 촬영 전 진료, 촬영 후 판독과 재진료 등을 모두 합하면 2,000파운드 깨지는 건 일도 아니겠더군요.
그걸로 끝이면 좋겠지만 만일 어떤 기저질환이 발견된다면? 고통도 시간도 비용도 감당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 괴로웠습니다. 나는 뭐하러 가족을 다 끌고 런던까지 와서 이 고생을 시키는가.
결론은요? 다행히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는 난시 진단을 받고 안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눈의 문제가 어지러움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프라이빗 병원 선생님 J의 조언에 따라 눈 검사를 받으러 가서 확인한 결과였어요. 물론 눈 검사도 안경 맞춘 비용도 모두 건강보험 밖, 프라이빗 기준으로 들어갔지만요. 아무튼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지금도 뭔가 집중할 때, 예를 들어 공부를 하거나 영상을 볼 때는 안경을 씁니다.
아마 영국 생활 초반에 적응 스트레스도 적잖았을 겁니다. 왜 안 그렇겠어요. 주변 아이들 따라 영어 유치원을 다니지도 않았고 영어 학원이라곤 영국 나오기 전에 번갯불에 콩 굽는 식으로 다닌 게 전부인 아이입니다. 학교 수업 따라가기도 벅찼을 겁니다. 눈의 문제와 심리적 요인이 겹친 거 아니었을까 추정합니다.
요즘도 아이는 간혹 피곤하면, 어쩌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어지럽다고 합니다. 이제는 간혹이어서, 어쩌다여서 다행입니다.
문제가 생긴 뒤 진료를 받고 문제를 확인하고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거의 50일 걸렸습니다. 비용은 대략 70만 원 정도 들었고요. 돈도 돈이지만 해결될 때까지 그 긴 기간 겪은 심리적인 고통은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이 글을 쓰느라 그 기간을 복기하다보니 지금도 가슴이 답답해져 옵니다.
한국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의 한국 의료 체계에서는 어떨까요? 앞으론 어떻게 될까요?
건강보험 중심의 현행 의료 체계가 망가지고 사설 의료 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면 한국에서도 이렇게 될 겁니다. 돈이 없으면 작은 문제도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거고 결국은 해결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당장 크게 다쳐도 많이 아파도 응급실을 통해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겁니다. 뭐 힘 있고 돈 많은 분들은 더 좋을 테지만요.
영국에서는 건강보험 제도가 망가지니까 사설 보험에 드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2022년에 따로 보험을 든 인구가 1,10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1년 사이에 무려 83% 늘어난 수치라고 합니다. 2중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상위 13%만 사설 병원, 영리 병원의 헤택을 누립니다.
설국열차가 따로 없지요? 한국 의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