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듯 끝나지 않는 세입자 검증
출국도 전에 런던 집을 골랐다. 구글맵으로 위성사진을 뒤지고 구글에서 근처 동네 매물을 검색하고 영상통화로 집을 살핀 결과였다. 와 이렇게도 되네, 환호했다. 물론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될 걸로, 그 정도로 나이브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입자에 대한 검증 절차가 까다로워서 애를 먹을 수 있다는 경고는 누차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말 몰랐다. 11월 1일에 계약 의사를 밝힌 뒤, 본게임이 시작되었다.
요구하는 서류가 정말 다양했다. 이유는 납득할 수 있다. 나는 외국인이고 영국 내에서 일을 할 계획도 없다. 과거에라도 영국 내에서 경제활동을 한 흔적도 없다. 그 누구도 내 신원과 신용을 확인해주고 보증해주지 않는다. 부동산 임대차 계약을 할 만한 신뢰자본이 전무한, '믿을 근거가 없는 자'인 셈이다. 그러니 하나하나 들여다봐야 한다.
여권 사본, 항공권 사본, 재직 증명서, 딸 학교에서 발행한 입학허가서, 너나 너의 아내를 초청하는 기관이 있다면 초청장, 비자를 받았으면 비자 사본, 비자를 신청한 상태면 접수증, 한국 내 은행 계좌 잔고증명, 거주지 증명(공과금 영수증이나 은행 발행 서류. 주민등록 등본과 관리사무소에서 발행한 입주민 증명서, 전기요금 고지서 제출), 영국 내 은행을 개설했다면 bank statement(은행 명세서). 서울에 있는 집을 세 줬다고 하니까 그걸 증명하는 계약서 사본을 달라고도 했다. 자산 규모를 보려는 거지. 심지어 자기소개서를 요구했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마다 새로운 요구가 날아왔다. 영문 이력서에 자기소개서, 가족 소개서를 쓸 때는 내가 집을 구하는 건지 영국 회사에 입사 원서를 내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취직하는 것보다 빡셌다면 과장일까? I don't think so.
이런 식이다.
너도 아내도 영국 내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돈을 벌지 않는데 집세를 낼 수 있겠어? 네 계좌에 적어도 75,600파운드가 있다는 걸 증명해. (월 2,550파운드 짜리 1년 계약을 하는데 7만 파운드 넘는 잔고를 증명하라고?) ㅇㅇ. 네가 외국인이고 영국 내에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월세를 6개월치씩 내야 할텐데 아주 넉넉해야 믿을 수 있어. 월세만 내면 끝나는 게 아니라 너네 먹고 쓰면서 생활을 해야 할 거 아냐? 생활비 자금까지 다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거야. (하아...ㅇㅇ 보낼게)
특정 시점의 잔고 증명서 말고 최근 석 달치 거래 내역을 줘.(왜?) 시스템에 그렇게 입력하게 되어 있어.(안 돼. 그게 필수라면 계약 못 하겠어.(그런 규모의 현금을 지속적으로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는 못했다)) 음 잔고증명서로 퉁쳐보자.
너 홀딩 디포짓*은 따로 내야겠다. 588파운드. (그건 또 뭐야) 본계약 전까지 우리가 보관해두는 개념이야. 1주일치 임차료 금액. (보증금? 이해함.)
(EPC*는 왜 제공 안 해? 그 집 엄청 추운 거 아냐? 전기 안전진단 보고서, 화재 경보기랑 일산화탄소 경보기 관련 정보도 줘.)ㅇㅇ 줄 거임.
계약 당사자는 비자가 있는 네 아내 이름으로 해야 해. 넌 permitted occupier로 명기될 거야. (나로 해도 된다더니 이제 와서 왜?) 미안하지만 확인해 보니 안 된대. 한국이 비자 면제국인 거는 알지만 그건 출입국 문제고 네가 부동산 임대차 계약을 할 자격은 안 된대. (OK)
잔고 증명을 네 아내 계좌로 다시 해와. (아 계약자가 아내니까?) ㅇㅇ 물론이지. 이게 안 된다면 1년치 월세 한꺼번에 낼래? (ㅋㅋㅋ;; 아내 명의 잔고증명을 드리겠읍니다. 바로요!)
예금이 수십억 원씩 있다는 고위 공직자들 재산신고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궁금하다. 어떻게 하면 현금을 저렇게 쌓아두고 살 수 있는가. 깨끗한 돈일까. 아니 궁금해 말자. 생계형 노동자, 일개미는 알 수 없고 알아봐야 별 수 없다.
그저 나는 성공적인 런던 안착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내 주거래 은행, 재직 중인 회사, 거주지 동 주민센터, 아파트 관리사무소, 인터넷 대법원, 아내의 주거래 은행, 대한항공 홈페이지 등등 별의 별 곳에서 서류를 발급 받아서 스캔을 하고 또 했다. 영문 서류를 발급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안 된다 싶을 때는 번역해서 영문본을 따로 만들어 첨부했다.
"G, 레퍼런싱 업체 얘들 경찰에 신고 좀 해줘. 아무래도 나를 죽일 작정인 것 같아!" 기가 차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부동산 중개업체 직원에게 하소연한 날도 있었다.
숱한 줄다리기가 말도 못하게 많았다. 일일이 복기하는 건 포기하자. 혈압이 오른다. 런던은 병원 가기 어렵다. "찍지 마 XX. 찍지 마. 성질이 뻗쳐서 증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은 보람. '임대차 계약 자격 있음'을 통보 받았다. 무려 12월 13일이었다. 11월 1일에 계약하자 했는데 우리 자격을 확인 받는 데만 6주가 걸린 셈이다. 6주 사이에 못해도 6년은 늙었다.
끝난 줄 알았다. 아니었다. 축배를 든지 딱 이틀 뒤, 12월 15일에 다시 "야 안 되겠다. 1년치 임차료를 한꺼번에 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신용을 완벽히 신뢰할 수 없다나. 하아 이 사람들이 진짜... 출국이 임박한 시점에 더는 못 하겠다. 그래 1년치 낼게. 이제 그만 좀 해.
숱한 고비를 다 넘고 우리는 12월 26일에 비행기에 탔다. 이삿날까지 임시숙소에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다.
*홀딩 디포짓
부동산 업체에 따라 본계약 전 보증금 혹은 가계약금을 따로 요구하는 곳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집을 보지 못하도록 홀딩, 붙들어두는 대가다. 본계약에 이르면 이 금액은 보증금의 일부로 산입된다. 하지만 집주인이나 중개 업체의 고의나 중과실 혹은 부동산 물건 자체의 문제가 없는 가운데 세입자 쪽 고의나 중과실로 본계약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이 돈은 돌려받을 수 없다.
*EPC(energy performance certificate )
건축물에 부여되는 에너지효율등급. A (최고 효율) 부터 G (최저 효율)까지 7단계로 분류된다. 런던의 주택들은 워낙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 B등급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엄청난 한파가 밀어닥치지는 않기 때문에 단열 개념이 별로 없고 창호도 매우 허술한 탓이다. 난방 효율이 떨어지는 집은 물론 추위를 각오해야 한다. 난방을 마구 틀어댔다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아 이게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이구나. 아 이래서 영국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도 벽난로에 나무를 때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