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잘못 걸렸다 그래서 불안해졌다
11월 1일에 계약 의사를 밝히고 6주만에 신원 조회(?)를 통과했다. 12월 26일에 런던에 도착한 뒤 홀딩 디포짓까지 보내고 입주 날짜만 기다리던 중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집 진짜 괜찮겠지? 1월 19일에 가서 후회하면 우린 1년을 고생해야 한다. 그렇게는 안 된다. 우리는 플랜B를 준비하기로 했다.
추위 속에 생존 자체가 목표던 시점에 무려 비상 계획을 마련하기로 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에어비앤비 빌런이 우리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너는 어떻게 도착하자마자 그렇게 많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어?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럽다."
내가 잘못한 건가 잠시 생각했다. 12월 30일부터 1월 19일까지 임시 숙소 삼았던 첼시의 에어비앤비에서 벌어진 일이다. 집주인 A는 막 체크인한 내가 이런저런 문제를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자 대뜸 왜 시비냐는 투로 반응했다. 연말을 맞아 휴가 차 인도에 가 있는데 이런저런 불만을 이야기하니 귀찮을 수는 있겠다. 아니 그래도 최소한 유감이라고라도 하든가. 아니 사과는 됐고 뭔가 해결책을 찾아줘야 할 것 아닌가.
런던 생활 극초반부터 이게 뭔가. 머릿속에서 불안 초조 분노가 꿈틀거렸다. 첼시에서 1박에 20만 원꼴로 숙소를 잡았으니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싼 게(?) 비지떡인가.
아닌게 아니라 집 상태는 '너저분'했다. 체크인 할 때 세탁기에는 젖은 빨래가 가득 들어 있었고 식탁 위 조명 전구는 꾸벅꾸벅 깜빡였다. 전기주전자에는 알 수 없는 물때가 가득 끼어서 썩은 것처럼 보여 우리를 기함하게 했다. 알고 보니 그저 수돗물에 있는 석회질이 엉겨붙은 것일 뿐 지저분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지만, 그건 나중에야 알게 된 거고.
냉장고는 '혼자, 잠만 자는 방'에나 있을만큼 작았고 냉동고는 이용할 수 없었다. 로어 그라운드(지하)에 있는 주방과 식당은 너무 추워서 식사하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결국 끼니 때마다 음식을 해서 접시째 들고 침실로 가져가야 했다.
침실은 퍼스트 플로어(한국식으로는 2층)였는데 물론 엘리베이터는 없다. 계단이 너무 좁고 가팔랐다. 이민 가방 세 개와 대형 트렁크 두 개, 기내 가방과 백팩까지 짐은 이삿짐 수준이었다. 당장 필요하지 않은 가방이라도 그라운드 플로어에 있는 거실에 두면 안 되겠느냐 물었더니 아예 답이 없다.
"너 빨래를 당장 해야 하는 거니?"
"그렇진 않아. 내일쯤 할까 생각 중이야."
"근데 너는 도착하자마자 집에 대해 비판하면서 빨래가 들어 있다고 했잖아."
"젖은 빨래가 들어 있으니까 그렇지?"
"집을 좀 즐기도록 해."
"그럴게."
"GOOD! 빨래를 해야 하면 세탁기에 있는 빨래들을 건조기에 넣어 돌리고 네 빨래를 세탁기에 넣으면 돼.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난 이해를 못 하겠어."
숙소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A는 왜 화를 내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멀리 인도에 있는 집주인과 싸워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일단 맞대응은 내가 안 한다만. 하아 진짜....
아마 청소하러 왔던 사람이 빨래를 돌려두고 그냥 가버린 모양이다. 그래 당신도 황당할 수 있다. 머무는 손님들마다 얼마나 이런저런 불만을 이야기했겠나. 그러게 집을 좀 잘 관리하고 준비해두지, 이런 생각이 바로 올라왔으나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보기로 한다. 미덕이 없지 않다. A는 분명 난방 하나는 빵빵하게 틀어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웠다. 건물은 단열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창문 유리는 2중이 아니었고 나무 창문과 창틀은 헐겁고 부실했다.
서울 같았으면 이런 집들 싹 다 뜯어버리고 대단지 고층 아파트 분양해서 돈 벌 텐데. 아니 창호라도 좀 좋은 걸로 바꾸면 추위는 확실히 덜할 텐데. 겨울엔 따뜻한 중동이나 인도로 여행을 가고 평소엔 가족들과 주로 생활비가 덜 드는 스페인에서 지낸다는 A는 집에 투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집이 이러니 묵는 사람들이 불만이 안 생기겠니? A 너 투덜거리지 마라. 우리끼리 있을 때만 이야기했다. 아무튼 춥다. 아내도 아이도 추위를 탄다.
"A, 난방 온도를 좀 올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좀 알려줄래?"
"Done."
반응 까칠하기가 사춘기 애들 같다. 화가 나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그렇다. 난 빌런에게 잘못 걸렸다. 이 자가 인도에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자. 그리고 혹시 모르는 분쟁에 대비해서 증거를 수집하자. 난 집안 곳곳을 촬영했다. 침대 프레임은 낡아서 천이 너덜거렸고 커튼도 마찬가지였다. TV는 두 대나 있었는데 모두 켜지지 않았다.
계단 중간에 있는 욕실은 터무니 없이 좁았다. 초미니 샤워부스에서 몸을 돌리다가 손잡이에 팔꿈치를 찧고 음소거 비명을 지르는 일이 숱했다. 욕조? 있을 리가. 계단을 반 층 내려가야 욕실이 있다는 건, 씻고 침실로 갈 때 후닥닥 뛰지 않으면 꽤 춥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 가지가지 한다.
사진과 동영상으로 증거를 모두 수집한 뒤에는 에어비앤비 사이트를 열어서 분쟁 해결 절차를 숙지하고 문제제기할 내용도 정리해뒀다.
그러다가 우리는 불안해졌다. 우리가 계약하기로 한 그 2층 플랏도 이상할 수 있어. 우리 눈으로 직접 살펴본 게 아니잖아. 영상으로는 못 봤던 문제가 있다면?
낡은 런던 집에서 산다는 게 이런 거 아닐까? 거리는 사진으로는 아름답지만 막상 살자면 불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지어 그 플랏 주인이 A는 찜쪄먹을 수준의 말도 안 되는 빌런이면?
그래, 우리가 대체 어떤 집을 잡았는지 눈으로 봐야겠다. 구글맵으로도 보고 영상통화로도 봤지만 못 미덥다. 긴긴 연말연시 휴무가 끝나자마자 부동산 중개업체 직원에게 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