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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Sep 10. 2024

보증금 100만 원 증발 사건

런던 집 구하기 1차 시기 대실패

런던의 부동산 업체 직원들은 성탄절부터 1월 3일까지 길게 쉰다고 했다. 우리가 히드로에 내린 12월 26일에는 물론 아예 연락도 닿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하는 건가 런던 사람들이 너무 노는 건가. 둘 다겠지. 일단 부럽다.


아무튼 입주 예정일은 1월 19일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여행자처럼 지내자. 세 가족은 이런저런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고, 온갖 옷가게를 돌며 방수 제품들과 방한용품을 사들였다. 오후 3시쯤 되면 세인즈버리나 웨이트로즈 같은 식료품점에 들러서 그날그날 장을 보거나 한식 식재료 가방을 열어서 끼니를 때워가며 살아남았다.


1월 4일, 아이의 첫 등교 날이자 부동산 업체 직원들도 처음 회사에 나가는 날이다. 바로 부동산업체에 연락했다. 집을 봐야 했다. 브렉시트 이후 외국인이 런던에 집 구하기는 더 어려워졌다고 했다. 1년치 월세를 한꺼번에 내는 조건으로 계약이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일단 집 좀 보자

"해피 뉴이어 G, 우리가 들어갈 집을 보고 싶어. 우리 뷰잉도 온라인으로 그냥 했잖아."

"해피 뉴이어. ㅇㅇ 물론이지. 근데 지금 한창 청소하고 페인트칠 하고 있을 거야. 니가 요구한 게 많아서 시간이 걸린다고."

"고마워. 그래서 언제 보러 가면 좋을까?"

"H가 현장 담당 직원이야. 걔랑 이야기해."

"Thanx! 우리가 오케이 하기 전에는 이 계약은 완료될 수 없어."


당황하지 않고 부하 직원 H에게 메시지.

"G에게 들었지? 우리 입주하기 전에 집을 좀 둘러보고 싶어."

"많이 messy한 상태라는 건 들었을 테고, 그래도 좀 정리된 뒤에 봐야 하지 않겠니? 다음주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보지 그래?"

"...10일이나 11일에? 되는 대로 좀 빨리 보자. 집 상태가 궁금하다고."

"당겨볼게....10일이 최선이야."

"...고마워 그 날 보자."


하여튼 런던에서는 속도는 기대하면 안 된다. 나만 홧병 난다. 일 주일 안에 집을 보여준단다. 됐다(라고 생각하자).


안 되겠다 이 집은

10일 오후, 우리 부부는 택시를 탔다. 약속 시간에 늦기도 했지만 아이 학교에서 집까지 차로 얼마나 걸리는지도 가늠해볼 겸. 런던의 상징과도 같은 시커먼 택시, 블랙캡을 처음 탄 거였다.


대략 4킬로미터 거리가 한 15분 걸렸을까? 요금은 13.4파운드가 나왔다. 24,000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공덕역까지가 4.5km인데 택시비가 대개 만 원쯤 나온다. 비슷한 거리를 가는 요금이 두 배 반쯤 되는 셈이다. 런던 물가...

블랙캡에는 보통 6명까지 탈 수 있다. 여럿이 움직이거나 짐이 많을 때는 괜찮은 선택지일 수도.

하여튼 약간 늦은 우리를 H는 반갑게 맞았다. 실제로 만나니까 입밖으로 영 잘 나오질 않는 영어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거랑은 다르군. 나는 좀 누그러져서 엘리베이터 없는 2층(한국식으로는 3층) 집으로 올라갔다.


들은 대로 청소는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욕실 천장 페인트 등 문제들은 해결되어 있었다. 각종 주방기구도 약속대로 일부 갖춰진 상태였다. 뒷마당은 그라운드 플로어 세입자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한 거 말고는 크게 기대를 배반하는 건 없었다.


짧게 둘러보고 나와서 나는 '음 뭐 괜찮네' 했지만 아내 생각은 달랐다.


"일단, 시끄러워. 왕복 4차선 대로변에 집이 있잖아."

"집 앞에 도로가 있다는 건 우리가 처음에 구글맵으로 볼 때부터 알고 있던 정보인데..."

"저 도로는 차들이 막 달리는 곳이야. 교통량도 많고. 밤에도 시끄러울 거야."

"그래서 도로쪽 창문은 2중창으로 했나봐. 또 걸리는 게 있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것 같아. 주변 지역 인구 구성도 그렇고. 또 학교까지 아무래도 오래 걸리는 거 아닐까? 말이 대중교통으로 40분이지 한 시간은 잡아야 할 거야. 10살짜리를 매일 데리고 등교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닐 걸? 집은 너무 중요하고 큰 문제니까 신중하게 생각하자."


길게 얘기해봐야 입만 아프다.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이 계약은 파기 될 운명이다. 소음과 이동거리, 안전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는 아내의 뜻을 굳이 꺾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밀어부쳐서 이 집에 들어왔다가 아내의 우려가 현실이 되면 그 책임 추궁을 감당할 수 없다. 런던살이 기간이 문제가 아니라 평생 괴로워질 꼬투리 아니겠나.


계약 파기, 보증금은?

집 본 다음날. 11일 오후 4시, H의 메시지.

"어제 너희 반가웠어. 자 이제 돈을 보내고 송금 내역을 캡처해서 좀 줄래?"


우린 집주인이 왜 계약서에 서명을 안 하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런던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계약서의 세부 항목을 일일이 살펴봤고 (뭘 모르니까)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서명까지 해서 넘긴 상태였다. 알고보니 집주인의 서명은 임대료가 입금된 걸 확인한 뒤에 이뤄진다고 했다. 적어도 이 업체는 그렇게 얘기했다. 집주인과 부동산 업체 쪽에서는 왜 우리가 입금을 안 하는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렇지. 너네 타임테이블에서는 빨리 돈을 보내야지 우리가. 하지만 우리 생각은 바뀌었어.


11일 저녁 7시, 송금을 재촉하는 현장 직원 H 대신 책임자인 G에게 회신을 보냈다.

"G,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 유감이야. 우리 가족은 아주 어려운 결정을 했어. 최종 계약 성사 직전이지만 이 계약을 취소하기로 했어."


곧바로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 자들은 업무용 전화기는 회사에 아예 놓고 퇴근하는 걸까? 그거 좋은 방법이군.


12일 오전 9시, 출근하자마자 G의 다급한 메시지.

"이런..무슨 일이야? 우리가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없어?"

"너와 너희 팀이 거의 2달간 노력해온 걸 나도 잘 알아. 미안하게 생각해. 우리 가족의 사적인 문제이고 결정이야. 돌이키긴 어려울 것 같아."

"부디 큰 일이 아니길 바라. 너와 네 가족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서울로 돌아가니?"

"그 카드도 고려하고 있어(라고 했다. 더이상 붙잡지 말라는 뜻으로). 내가 이미 보낸 보증금은 돌려받을 수 있겠지?"


이 자들이 의외로 질척거리지는 않는구나. 다행(?)이다.


12일 오전 10시 30분, H의 부재중 전화에 이은 메시지.

"G에게 들었어. 근데 이유가 뭐야? 괜찮은 거야?"

"세세하게 말할 수는 없고, 아무튼 우리 문제야."

"아 이유를 알고 싶었어. 네가 네 사정으로 계약을 포기하겠다면 보증금은 돌려줄 수 없어. 유감이야."

"ㅇㅇ 그러리라고 생각했어. 고마웠어. 행운을 빌어."


요는 디포짓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려면 집의 심각하고 구체적인 하자를 뒤늦게 발견했거나 계약 내용에 중대한 문제점이 있는 점이 확인됐다거나 아무튼 우리 책임이 아닌 어떤 문제가 있어야 하는 거다. 이미 디포짓을 받아둔 업체 입장에서는 세입자 측 사정으로 계약이 성사되지 않게 된 이상 일단 디포짓이라도 챙기게 된 셈이다. 쿨내는 적어도 큰 손해는 보지 않는 상황이어야 나는 법이다.


이렇게 끝났다. 11월 1일에 내가 계약 의사를 밝힌 집이. 6주 넘게 신원조회 고문을 견딘 집이. 100만 원 가까운 돈을 포기하면서.


온라인 뷰잉으로 집을 구하겠다는 계획 자체가 무리였을까? 차라리 돈을 좀 주더라도 한국인들이 제공하는 정착 서비스를 이용했다면 고생이라도 덜 했을텐데. 집을 또 구해야 하는데 레퍼런스 과정을 새로 거쳐야 하는구나. 그게 빨리 끝나기나 할까. 새로 구한 집은 아이 학교에서 가까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또 월세는 얼마나 더 비싸질 것인가. 온갖 근심 걱정에 머리가 아팠다.


다시, 집을 구하라

하지만 이렇게 쉽게 계약 파기 결정을 할 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사실 우리는 플랜B를 준비하고 있었다. 즉시 입주할 수 있는 곳으로. '초품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 학교에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로. 제3의 부동산 업체는 SW7 지역 안에서 꽤 많은 물건을 잡고 있었다. 그 중 비교적 괜찮은 곳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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