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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Sep 12. 2024

집 보기부터 입주까지, 단 열흘

런던 집 구하기, 2차 시기는 속도전

1월 초부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아이 학교 인근 집을 보기 시작했다. 적당한 집을 비교적 쉽게 발견했다. 어렵게 구한 집의 계약을, 적지 않은 보증금까지 포기하면서 파기한 배경이다. 새 집은 SW7, 런던의 중심 지역인 zone 1중에서도 캔싱턴임을 감안하고 보셔야 한다. 지나치게 비싸서 눈물겨울 거라는 얘기...


서비스드 레지던스, 다 좋다...임대료만 빼고

서비스드 레지던스는 1베드 1소파베드 형태 방이었다. 입주한다면 물론 소파베드는 내 차지가 되겠다. 음식물을 조리할 수 있도록 인덕션과 전기 주전자, 전자레인지도 갖춰져 있다. 세탁기도 있고.


이틀에 한번꼴로 청소와 침구 교체 서비스가 제공된다. 집을 월세 계약하는 것과는 달리 전기와 수도 요금, 세금 부담은 따로 없는 개념이다. 아이 방학 때 유럽 여행이라도 길게 간다면 그 기간동안은 짐을 다 빼고 임대료는 안 내도 되니 나쁘지 않을 것도 같았다. 바로 앞에 대형 마트가 있는 점도 좋아 보였다. 세 식구가 매일 외식을 하다가는 거덜 날 테니, 자주 식재료를 사다가 조리를 해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임대료는 부담스러웠다. 일주일에 850파운드, 한 달이면 3,400파운드다. 1년간 지낸다면 장기숙박 할인이 있을 법도 한데 끝내 제시하지 않았다. 거리가 아이 학교까지 걷기엔 애매하게 멀었다. 좋은 계절에야 상관 없겠지만 비가 잦은 런던의 긴 겨울에는... 안 되겠다. 그리고 중동계 직원이 영 못 미더운 태도로 노골적인 영업 멘트를 자꾸 한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패스!


지하지만 지하같지 않은 로어그라운드

F 부동산 업체 직원 S는 스페인 어느 섬에서 왔다는 젊은 친구였다. 늘 어딘가 피곤해 보이긴 해도 이 친구, 매우 적극적이다. 밥 먹을 짬도 없을 정도로 뷰잉으로 바쁜 말단 직원이라 빈틈은 많았으나. 자고로 영국에선 한국처럼 빠릿하고 정확한 걸 바라면 안 되는 법이다.


1월 10일. S는 처음엔 우리 부부를 lower ground 집으로 데려갔다. 한국식으로 이야기하면 반지하겠으나, 런던 건물들은 도로와 건물 사이에 공간을 떨어뜨려 놓아서 한국의 반지하와는 달랐다. 창 밖으로 바로 행인들의 신발이 보이거나 호기심 많은 관광객과 눈을 마주치는 지경은 아니었다. 볕이 들 공간이 있는만큼 아주 침침하거나 눅눅할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 예산 범위 안에 있는, 존2의 2층 플랏과 크게 차이가 없는 합리적인 월세로 나온 집이었다. 아무 관심 없이 갔지만 마음 먹고 살려고 하면 살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도, 아무리 최악은 아니라 해도, 지하는 꺼려져서 패스.


천장 높은 아름다운 방에 혹하다

부동산 업체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높은 천장에 마루 바닥 등 아름다운 그라운드플로어 플랏. 하이드 파크의 녹지와 가까운 멋진 흰색 건물은 Gloucester Road와 South Kensington역과 가깝다."

계단참이 있어서 살짝 올라와 있는 그라운드 플로어. 딱 사진에 보이는 저런 흰 건물이다. 부동산 업체 말마따나 천장이 높고(3.72미터) 멋드러진 샹들리에가 달린 방은 아름다웠다. 큰 창으로는 볕도 아주 잘 들었다. 눈썰미 좋은 분들은 이미 한번 눌러보셨을, 필자 소개 사진에 있는 바로 그 방이다.


일단, 아이 학교까지 10분 컷이다. 차 탈 필요도 없이 걸어서 10분.


임페리얼컬리지 바로 앞에 있어서 학생들이 주로 살았던 모양이다. 침대와 소파, 식탁으로 맞춤한 원형 테이블과 의자 4개, 2인용 소파까지 갖췄다. 이불과 각종 주방용품, 그릇, 컵 등 식기류에 커틀러리까지 모두 있었다. 새로 온 친구들이 계속 사들였는지 진공청소기는 두 개가 있었고 심지어 금고(못 열어봤다 아직도)와 체중계도 있다. 서랍장에는 닌텐도위와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TV 아래 장식장에는 소니 오디오와 스피커 세트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쌓였다. 우린 아랍 왕자와 중국 공주가 살았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초기 정착 비용 0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걸리는 게 없지 않았으니, 집은 작은데 터무니 없이 비쌌다. 569제곱피트, 16평에 못 미치는 집 월세가 3,100파운드로 제시되어 있었다. 거기에 세금과 각종 공과금을 더하면...뻔한 백수 살림에 받을 수 없는 조건이다.

 

다시 줄다리기, 짧게 끝내자!

내가 집을 본 날, 1월 10일에 제시한 첫 월세는 2,900파운드였다. 월 2,550파운드짜리 계약을 위해 이미 낸 보증금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점을 호소했다. 어라? 그런데 S는 내 제안을 'strong offer'라면서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고뤠?


공은 S의 팀장 H에게 넘어갔다. H에게는 소심하게나마 조금 더 내려서 제시했다. 한 달 2,850파운드. 사실 여전히 어마어마한 돈이지만 딸 학교까지 걸어서 10분 컷으로 오는 비용으로는 나쁘지 않다 자위했다. 먼 집에 살면서 오가는 버스비, 또 지각했다고 가끔 타게 될 택시비만 해도 300파운드는 금방 깨지겠지. 시간과 체력도 아끼고 좋지 않겠나. 아이 아침잠도 더 자고.


11일에 곧장 기존 계약 파기 의사를 기존 업체 책임자 G에게 전달했다. 이미 보낸 보증금 100만 원 가량은 돌려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였다.


이제 경험이 있는 나는 새 집을 확실히 잡기 위해 '6개월치 선불 가능!' 먼저 질렀다. 1년치를 한꺼번에 낼 뻔도 했는데 반년치는 뭐. 부동산에서는 1년이 아니라 2년으로 계약을 하고, 1년이 지나면 rolling tenancy가 된다고 했다. 계약 후 10개월이 지난 시점부터는 언제고 두 달 전에만 통보하면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런던에 더 있게 될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손해 볼 건 없는 조건이지. 콜.


H는 이 집 종전 월세가 2,840파운드였다면서 곤란해하면서도 집주인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다. 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종전 월세에 딱 10파운드 얹어서 제시했네? 집을 팔 생각인 주인 M은 그걸 또 승낙했다. '매수 희망자가 집을 보러 올 때 좀 잘 협조해달라'는 조건만 달아서. 아일랜드 할아버지의 호방함! 사실 곧 팔 집인데 비워두느니 임대료를 어떻게든 받는 편이 나았겠지. 과거는 묻어두고 미래로 나아갑시다(?).


6주 걸렸던 레퍼런싱, 4일만에 클리어!

좋아 빠르게 갓! 12일에는 반 년치 임차료와 보증금을 포함해 2만 파운드를 한국 계좌에서 송금했다. 이제 중대한 문제가 없는 한 이 집은 우리 거처가 된다.


곧바로 tenant referencing이 시작됐다. 첫 계약에서 6주를 괴롭였던 레퍼런싱 과정을 떠올리며 긴장했지만 이 업체는 굉장히 수월하게 진행됐다. 다만, Share Code를 요구해서 잠시 지체되었다. 비자가 있어야 셰어코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무비자로 버티고 있는 나는 만들 수가 없다. 한국은 비자면제국이라는 사실을 영국 정부 공식 사이트에서 찾아서 보여주자 바로 해결되었다.


내 직장 상사에게 이메일을 보내 레퍼런스 체크를 하기도 했다. '이 자는 지금 런던에서 부동산 계약을 앞두고 있다. 너네 회사에 재직 중인 게 맞느냐. 정규직이냐 뭐냐. 이 자는 이 임대차 계약 기간 동안 급여를 지급 받느냐. 연봉은 얼마나 되나.' 등등.


전 레퍼런싱 업체가 이상한가 이 업체가 나이브한가. 혹은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가 된 건가. 셋 다일까? 모르겠다. 아무튼 쉽게 끝나서 다행일 뿐. 1월 15일 저녁 8시반,  S는 선언했다. "모든 게 완벽한 것 같아. 레퍼런싱은 완료됐어. 우리 회사 계좌로 돈이 들어온 것도 확인되었어."


부동산 사무실 커피는 왜 맛있는가. 공짜라서? "우리 진짜 별 경험을 다 한다." 공짜 커피를 든 부부는 마주 보고 웃었다. 런던의 부동산 업체 사무실에 앉아 있는 우리 모습이 새삼 신기하다. 1월 16일 오전 11시 반. 정식 계약서에 직접 서명했다. 이제 정말 이사만 하면 된다! 우리는 아이 학교 바로 앞 독일 레스토랑에 가서 소시지와 피자를 놓고 축배를 들었다.


1월 19일 아침.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바리바리 이민가방을 챙겨서 택시로 이사했다. 비앤비에서 새 집까지는 걸어서 10분쯤 걸릴까? 짐가방을 끌고 밀고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푼돈 아끼자고 고생하지 말기로 했다. 파란만장 집 구하기는 에어비앤비 빌런 A와의 계약 마지막날에 딱 맞춰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와 이 집 좋다!" 등교는 비앤비에서 하고 하교는 새 집으로 한 아이는 환호했다.


10월 중순부터 런던 부동산을 뒤지기 시작했다. 12월 26일 런던 도착. 호텔과 에어비앤비를 거쳐, 그 사이에 보증금을 100만 원 날려가며 집 계약을 한번 엎은 끝에 1월 19일 최최종 이사. 멀고도 험한 길을 돌아 이제 홈 스위트 홈에서 즐거운 런던 생활이 시작돼야 할 참이었다. 하지만 이 집에는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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