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집을 구할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이야기
집이 부족한 런던은 집값과 임대료가 상상을 초월한다. 서울에서 반지하나 옥탑에 살림집을 만들어서 세입자를 받은 것이 산업화로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기였던 것처럼 런던도 꼭 그렇다. 원래는 사람이 자는 공간으로 이용되지 않던 곳들이 이젠 조각조각 다 집이 돼서 세입자를 맞이한다.
본문의 층수 표기 방식이 한국과 달라 헷갈릴 수 있을테니 먼저 정리하고 가자. 영국식 표기를 먼저, 한국식은 괄호 안에 적었다. 로어그라운드(지하), 그라운드(1층), 퍼스트(2층), 세컨드(3층)...제목만은 한국식으로 적었다.
한국이 그러했듯, 영국도 돈 많은 상류층의 경우 일하는 사람들까지 집안에 함께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건물에서 로어 그라운드는 주로 하인들의 공간이었다. 하인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일터. 주방과 세탁실, 석탄 창고나 그밖에 집안에서 쓸 물건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주로 쓰였다고 한다.
로어 그라운드 앞에는 베이스먼트 피트(basement pit) 또는 베이스먼트 웰(basement well)을 두기도 한다. 주로 건물의 그라운드 플로어 입구 앞에 포치를 만들어서 손님이 빗물을 털거나 신발에 묻은 온갖 오물을 제거한 뒤에 초인종을 누르고 집에 들어오도록 했다. 포치 아래 양옆으로 지하실 앞에 길게 공간을 비워둔 곳을 베이스먼트 피트라고 한다. 지상이든 지하든 건물의 외벽은 보도 경계선에서 1~2미터 가량 물러서 있다고 생각하면 쉽다.
주로 창고였던 로어 그라운드에 비싼 유리 창문을 만들지 않고도 채광과 환기가 가능하도록 한 게 가장 큰 이유였을 거다. 하인들을 위해서까지 건축비를 더 쓰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사우스 캔싱턴 지역에 죽 늘어서 있는 흰 건물들은 대부분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건축되었다. 1851년 대박람회 이후에, 로열알버트홀 등이 자리잡은 시기 이후 집들이 집중적으로 지어졌다나. 이 때 이런 구조가 크게 유행했던 모양이다. 대부분 구조가 똑같다.
빈 터가 있으니까 하인들이 작업 공간으로 활용하기는 좋았을 테다. 대갓집 한옥의 넓은 마당처럼 말이다.
보행자와, 또 마차나 차가 다니는 도로와 집이 바로 접하지 않도록 해서 소음과 먼지, 온갖 오물이 집으로 바로 들어오는 것만은 막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가 폭발하던 당시 런던에서 거리 청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을 테니까.
아무튼 로어 그라운드는 하인들조차 자는 공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1800년도에 100만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100년 사이에 700만 명 가까이가 될 정도로 인구가 폭발하자 당장 집이 너무 부족했다. 당시엔 상하수도 시설조차 부족하고 탬즈 강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많이 나는 등 도시 전체의 위생 상태가 엉망이었다. 로어그라운드는커녕 그라운드플로어도 사람 살 곳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자 마자 만나는 그라운드 플로어는 주로 거실이나 응접실 용도로 쓰였다. 큰 창문을 내고 천장을 높게 만들어서 개방감을 주고 채광과 통풍을 원활하게 했다. 회화나 조각 작품을 배치하는 등 집주인의 취향과 경제적 여유를 과시하기도 하고. 이변이 없는 한 이곳에 침실은 없다.
집주인 공간은 퍼스트 플로어부터다. 르네상스 건축에서는 피아노 노빌레(Piano Nobile)라고 해서 웅장한 중앙 계단으로 올라가서 만나는 크고 화려한 위층이 있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대량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간결한 계단만으로 층을 연결했다.
퍼스트 플로어에는 대형 응접실이나 파티룸 등 사교 모임을 위한 방들이 배치됐다. 경우에 따라 침실이 마련되는 경우도 있었다. 퍼스트 플로어도 층고를 높게 짓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크고 장식적인 창문을 내서 익스테리어를 화려하게 마감하기도 했다. 아무튼 남에게 보여주는 부분은 최대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게 '국룰'이었나보다.
그럼 대체 잠은 어디서 자느냐. 주로 세컨드 플로어였다고 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장식적인 요소가 적었다. 남들이 안 보니까. 하인들은 그보다 더 높은 층에서 잤다. 한국식으로 얘기하면 옥탑방 같은 개념인데, 물론 더울 때 덥고 추울 때는 추운 방이 되겠다. 최상층은 층고도 낮게 만들어서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겠다.
무엇보다 사생활 보호가 안 되니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나 현관에 선 손님과 눈이 마주칠 수 있는 공간에서 자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보안 측면에서 봐도, 외부인이 침입한다면 그라운드 플로어가 더 위험하긴 하겠다.
또 예나 지금이나 난방이 잘 안 되는 영국 건축물 사정을 볼 때, 그라운드 플로어는 더 추울 수밖에 없다. 현관을 통해 찬바람이 술술 들어온다. 빅토리안 풍의 건물에 있는 큰 창문 역시 보기엔 좋아도 열 효율은 떨어진다.
층고가 높으면? 물론 춥다. 런던은 이미 9월부터 쌀랑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올해는 5월에도 추운 느낌이 남아 있었다. 실화다. 길고 우울한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침실 위치 선정할 때 그라운드 플로어를 걸러야 했을 거다.
채광 역시 그라운드 플로어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퍼스트 플로어 창 밖으로 테라스가 돌출되어서 아래층 채광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적잖다. 가로수도 그늘을 드리운다. 섬네일 사진은 실제 이 지역 모습이다. 넓은 잎이 풍성한 버즘나무 가로수는 5층 높이까지 자라 있다. 겨울엔 볕까지 안 들면 정말 춥다.
반대로 야간에는 거리의 온갖 소음에 가로등 불빛 공격까지 들어온다. 메인 출입문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소음도 밤낮 가리지 않고 이어진다.
사람만이 아니다. 쥐나 파리 모기 등 온갖 해로운 것들의 접근도 물론 그라운드 플로어가 상대적으로 쉽다. 지금도 런던 거리는 일주일에 두 번 쓰레기 내놓는 날마다 거대한 쓰레기장이 된다. 그 쓰레기를 뒤지러 쥐 등 갖은 손님들이 오간다. 쥐에게는 그라운드 플로어와 로어 그라운드가 놀이터 사냥터다.
우리가 센트럴 런던, 그것도 캔싱턴의 그라운드플로어에 작은 집을 얻었다는 걸 뒤늦게 안 영국인 형님 J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 집이 그렇게 비싸다고? 여긴 원래 사람 사는 곳이 아니야." 맞다. 10일 사이에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게 되어 좋아했지만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물론 그라운드 플로어가 싸기는 싸다. 보통 그라운드 플로어는 퍼스트나 세컨드 플로어보다 10~20% 가량 월세가 저렴하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초대 손님은 정말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 때 그라운드플로어의 단점을 이 정도로 세세히 알았다면 그 친구들을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