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런던 백수 Sep 17. 2024

냉장고는 없고 쥐가 있다 두 마리나

입주는 했는데 정착은 언제 되나

10일 사이에 이사하기, 모든 게 부드럽지는 않았다. 착착 진행되는 줄 알았지만, 아니 그러길 바랐지만 이사 바로 전날 폭탄이 터졌다.


입주를 늦추자고? 그것도 이사 전날에?


"너네 입주 날이 내일이지? 늦춰야 할 것 같아."


부동산 업체 F의 매니저 H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우리가 첼시의 에어비앤비 빌런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는 거니...그 집에 더 있고 싶다 않다 우리.


"집주인 M이 너네 일정에 맞춰서 집을 빨리 준비하려고 노력했어. 근데 냉장고가 설치가 안 됐나봐."

"이제 와서? 그렇다고 우리 에어비앤비 체크아웃이 당장 내일인데 연장이 되겠니?"

"ㅇㅇ 나도 상황은 알고 있어. 그래도 한번 체크는 해보는 게 어때? 입주를 미루면 그 날짜부터 계약 효력이 발생하는 걸로 하자."


우리가 들어갈 집의 직전 세입자인 중국인 여학생은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쓰던 물건들도 모두 그대로 두고. 각종 공과금 독촉장을 남기고 증발했다. 그녀의 사정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난 가전제품과 주방용품과 식기까지 거의 새 물건 상태로 있다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는데. 냉장고도 입주일 전까지 설치해두겠다고 했잖아 분명. 근데 이제 와서 기다리라고? 안 돼. 우리는 내일 들어갈 거야.


저녁 7시 21분 "아직도 확정이 안 됐니?"

밤 9시 2분 "우린 임차료 6개월치를 선불로 이미 냈어. 그러고도 이사 전날 밤 9시까지 내일 들어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H는 끝내 답이 없다. 이 마당에 퇴근해서 마음 편하게 파티라도 즐기고 있을까. 속은 나만 타는군.


19일 오전 8시 39분 "H, 나 아직도 아무 소식도 못 들었네?"

그렇다. 우리 입장을 분명히 했는데도 당일까지 확정이 안 됐다.

"굿모닝. 어제도 얘기했지만 냉장고가 문제야. 집주인은 일요일까지 런던에 못 온대. 에어비앤비는 연장이 안 된다는 거지?"

"ㅇㅇ 미안하지만 어제 이미 얘기했잖아 그건. 우리 곧 이 집에서 체크아웃해야 해. 우리가 오늘 그 집에 도저히 입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다른 숙소 잡는 비용을 너희 회사든 집주인 M이든 부담해줄래? 그럼 임시 숙소를 구해볼게."


오전 9시 40분. 극적 타결. 소형 임시 냉장고를 집주인 M 비용 부담 하에 설치한다. 입주 날짜는 오늘로 한다.


바로 짐을 챙겨서 빌런의 소굴에서 탈출했다. 우린 살아 남았다!


일단 임시 냉장고로 출발

냉장고 자리는 휑덩그렁하다. 아일랜드 할배 집주인 M이 한번 와야 할 것 같은데, 입주 직후에 들르겠다던 그는 업무상 카타르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은 참 글로벌하기도 하지. 그러더니 귀국 뒤에도 영 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주인이 안 오면 어떤가. 주문하자 임시 냉장고. 1월 21일에 아마존에 주문한 냉장고는 단돈 60파운드 짜리. 바로 다음날 도착하고 보니 반찬통 두어 개와 우유 따위만 넣으면 문이 안 닫힐 정도로 작고 하찮았다. 불편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매일 장보는 것쯤은 운동 삼아 재미 삼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냉장고는 곧 설치해주겠지 뭐.


우여곡절은 여전히 있지만 우리는 새 집에 적응해갔다. 아이도 학교에 곧잘 재미를 붙였다.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잘 지내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손님이 오고야 말았다.


처음 온 놈은 숨을 쉬지 않았다

"쥐가 나왔어. 어떡해!"

아내의 얼굴은 허옇게 질렸고 목소리는 떨렸다. 와중에 아이가 들으면 안 된다는 듯 목소리는 한껏 낮았다. 표정을 보니 이건 실제 상황이군. 1월 26일 저녁, 사건 발생 장소는 거실이다. 아내와 아이가 자는 침대가 그때는 거실에 있었다. 그러니까, 아이 침실에서 뭐가 나왔다고?


달려가보니 진짜 쥐 한 마리 거실 바닥에 있었다. "잠깐만...나도 쥐를 잡는 건 처음이라고!"


하아...이걸 어쩐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 손님은 움직이지 않는다. 건드려도 반응이 없다. 이것은 불행인가 다행인가. 사태 파악이 안 되지만 일단 황급히 사체를 주워서 집 밖 길거리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왔다.


침대를 옮겼다. 아이는 쥐가 나오지 않은 방에서 자도록. 아이는 아직 상황을 모른다. 앞으로도 몰라야 한다.


또? 이번엔 숨 쉰 채 발견

끝이었다면 좋았겠으나 아내는 또 한번 다급했다. 1월 29일 저녁에 다음 분이 방문했다. 거실 소파 옆에 엎드린 상태. 이번엔 분명 살아 있었다. "...미치겠네. 내가 처리할게 안방에 가 있어."


비닐장갑을 끼고 빗자루를 들고 덮쳤는데 어라? 상태가 이상하다. 움직임이 너무 둔해. 가만 보니 얘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빗자루로 쓸어담아 지퍼락에 넣었다. 그 와중에 집주인에게 알리겠다면서 머그샷도 찍어뒀다. 사진을 여기 첨부할까 하다가 포기. 혐짤이다.


두 번째 손님도 붙박이장과 벽 사이 좁은 틈으로 온 게 분명했다. 지난번엔 왼쪽이었는데 이번엔 오른쪽. 핏자국은 붙박이장 앞에서 소파쪽으로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로 기어나와서 발견된 것이로군? 역시 CSI급 증거 수집. 그 친구도 집 밖 쓰레기통에 처리했다.


닦고 또 닦고...

현장 증거 수집과 머그샷 촬영, 집 밖 추방까지 마무리되자 아내는 필사적으로 청소를 했다. 쥐도 쥐지만 체액이 곳곳에 있었으니 감염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했다. 독한 소독 약품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입주 직후 열흘 사이에 두 번이라...게다가 한 번은 사체, 한 번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밖에서 쥐약을 먹은 상태로 이 집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하긴 집 보러 온 날부터 공동현관에 붙어있던 "이 동네에 쥐가 출몰함. 음식물 관리에 주의하시오" 경고문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있구나! 그렇다면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다? 으악!


영국에선 전문 자격 없는 사람은 쥐약을 놓을 수도 없는 모양이다. 할 수 있는 조치를 뭐라도 하자. 나는 바로 아마존에 설치류 퇴치기를 주문했다. 쥐들이 싫어하는 초음파(?)를 발생시키는 기계인데 콘센트에 꽂는 형태다.


한 세트에 네 개씩 들어있는 포장이었는데, 배송된 걸 꽂아보니 두 개가 작동이 안 되네? 하아... 반송시킬까 하다가 한 세트를 더 주문했다. 단 하루라도 경계작전에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 인테리어고 뭐고 익스텐션을 늘어뜨려서 쥐가 기어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틈에 퇴치기를 켜뒀다. 추가로 온 물건은 모두 정상 작동. 안 되는 놈을 넣어서 한 세트는 반품했다. 내 돈도 소중하다.


퇴치기로도 불안은 쫓지 못했다

사실 촌놈인 나는 쥐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쥐는 어디에나 있다. 시골집 천장에서는 밤마다 쥐들이 우다다닥 뛰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게다가 여긴 런던이고 우린 지은 지 오래된 집의 그라운드 플로어에, 그것도 공동현관문 바로 앞 방에 입주했다. 쥐가 없는 게 더 이상하겠다. 이 가능성을 계약 전에 알았어야 했다.


어쨌든 그 친구들이 우리가 이용하는 공간에 출몰한 이상, 게다가 아주 좋지 않은 상태로 나타난 이상, 아내와 아이가 겪을 공포를 해결해야 했다. 서울에서, 관리가 잘 되는 현대식 공동주택에서 살던 사람들이 집안에 쥐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서둘러야 한다. 버럭 까칠 불안 당황이 동시에 활동을 시작했다.


문제는 늘, 런던의 속도

집주인 M에게 상황이 엄중하다고, 빠른 시일 안에 방제 전문가들이 와야 한다고 촉구했다. M은 내가 '10살 아이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를 제기하자 곧바로 수긍했다. 영국에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사람들 반응이 달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긴 런던이다. 문제는 주로 느려터진 속도에서 발생한다. 여전히 냉장고는 설치되지 않았고 언제 쥐가 또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대체 정착은 언제 끝나는가?

이전 07화 1층에는 원래 침실을 두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