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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Sep 19. 2024

쥐잡이는 왜 오지 않는가

두 번째 쥐를 처리한 1월 29일 밤, 나는 곧장 집주인 M에게 생포한 쥐의 머그샷과 혈흔이 낭자한 침입 현장 사진들을 보냈다. CSI런던. 그 밤에 M은 pest control 서비스를 불러야겠다고 했다. 분명히. 하지만 런던의 속도는 내 기대보다 훨씬 느리고 또 느렸다.


1월 30일

"M, 쥐 문제는 우리 가족의 심각한 고민거리야. 나는 이미 설치류 퇴치기를 아마존에서 주문했어. 너도 좀 빨리 움직여주길 바랄게. 부탁이야."

"지난 15년 동안 이런 문제는 한 번도 없었는데 정말 유감이야. 빨리 해결하자."

"ㅇㅇ 제발."


집은 우울하다. 기분 전환을 위해선 '아름다운 것'이 필요하다. 집 앞 RCM, 로열컬리지오브뮤직(왕립음악대학)에서는 무료 콘서트가 자주 열린다. 인근 주민들에게 문화 혜택을 주고, 동시에 음악 전공 학생들에게는 무대 경험을 쌓게 하려는 목적이다. 학교 지하의 작은 공연장에서 열리는 연주라 사운드는 다소 아쉽더라도 고통을 잊기에는 충분하다. 잠시라도.

런던의 겨울날 이렇게 화창하기도 쉽잖다. 1883년 문을 연 대학 건물 바로 맞은편에는 로열알버트홀이 있다.

2월 1일

"M, 오늘 날씨 정말 lovely하다. 즐기고 있기를 바라. 냉장고 설치 관련해 업데이트해줄 소식 있어?"(그렇다. 1월 19일에 입주한 집에서 우린 여전히 미니어처 냉장고로 버티고 있다)

"ㅇㅇ 날씨 정말 좋네. 배송 날짜를 체크하고 있어. 다음주 중반에는 설치할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다음주? 어후...) ㅇㅇ 고마워. pest control은?"

"그쪽에서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야."

"...."


다크서클은 점점 짙어졌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쥐가 나왔던 거실에 소파베드를 놓고 나 혼자 잤다. 새벽에 부스럭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도 잠에서 깼다. 점점 피폐해져갔다. 생계형 노동자가 이 꼴을 보려고 휴직한 게 아닌데...이 집으로 오기로 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 런던에 온 것부터가 문제였나?


살기 위해, 나가자. 테이트모던, 디자인 뮤지엄을 둘러보며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집 앞 V&A 뮤지엄은 집보다 안락하고 따뜻한 안식처였다.


2월 4일에는 클라라 주미 강과 김선욱의 연주를 위그모어 홀에서 들었다. 일요일 아침 콘서트는 베토벤의 Piano Sonata No. 8 in C minor Op. 13 'Pathétique': –II. Adagio cantabile와 Violin Sonata No. 9 in A Op. 47 'Kreutzer', 그리고 크라이슬러의 Liebesleid로 이어졌다.


클라라가 크라이슬러 곡 악보 없이 무대에 올랐다가 가지러 나가는 해프닝이 있었다. 클라라를 기다리는 동안 김선욱은 즉석에서 독주로 무대를 가득 채웠다. 관객들의 큰 박수 속에 클라라가 돌아왔고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일요일 아침 콘서트 후엔 지하 카페에서 간단한 음료도 제공한다. 독주를 섞어 발효시켜서 알코올 도수를 소주 수준으로 높인 포도주를 석 잔쯤 마시니까 적당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이런저런 해프닝이 있더라도 결과가 좋으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시간은 계속 가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집 주인도 쥐 잡는 업체도 냉장고 설치 업체도.


2월 7일

"(이악물)안녕 M. 수요일인데 아무 소식이 없네? 기다리고 있어."

"가전 회사 보쉬에서 연락이 왔어. 포워드해줄게. '(전략)설치는 2월 15일 목요일에 해드리겠습니다. 설치 기사가 도착 1시간 전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쉬익 쉬익)한 주 더 기다리라고? 대애박. 그렇다 치고, 쥐는?"

"ㅇㅇ 그 회사도 연락이 왔어. 전문가가 세 번 방문할 거라고 하더라. 비용은 275파운드. 너 편리한 시간에 오도록 조율할래?"

"고마워 M. 이제부터 방제업체와는 내가 직접 연락할게."


이 아일랜드 할배는 왜 이미 와 있는 연락을 공유해주지 않았나. 곤란하거나 귀찮으면 일단 깔고 앉아서 뭉개고 보는 것이 영국의 국룰인가. 혹시 내가 외국인이라서? 유색인종이라서? 온갖 꼬인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아니다. 됐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나의 일을 하자.


2월 8일

" Prosts Pest Control이지? 나 SW7의 M 집에 사는 세입자야. 우리 집 문제는 접수되어 있지? 내일 언제 올래?"

"내일 오후에 갈게. 12시에서 4시 사이에."

"(역시 영어가 아직 잘 안 들리는구나. 4시간 범위를 두지는 않겠지 설마.) ㅇㅇ? 12시야 4시야?"

"12시에서 4시 사이. 다른 집들 방문해야 하니까. 일 돼 가는 거에 따라 달라지지 방문 시간은."

"(이것들이 진짜...원래 이러는 거야 얘들은?)그럼 나는 집에서 대기해야 하네?"

"도착 한 시간쯤 전에 연락할게. 1시간 이내 거리에서 볼 일 보고 있어."

"고~오맙습니다. 내일 봐."


나는 이 와중에 왜 이렇게 예의 바른가?

누구와 싸우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아직 내 뜻을 빠르고 정확하게 표현할 만큼 영어가 잘 안 나온다. 게다가 따져서 상대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끄집어낸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느냐다. 나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 늘 고맙다고 했고 너희들 덕분에 그나마 안심이라고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대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는 편이 나았다. 집에만 있으면 춥고 심란하다. 우리가 런던으로 온 이유 중에는 여러 형태의 수준 높은 공연과 음악, 미술, 전시 등도 컸다. 그래 즐기자. 그게 남는 거다.


8일 저녁에는 아이와 뮤지컬 마틸다를 봤다. 공연장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고 간식을 먹어가며 신나게 웃고 떠들어가며 즐기는 영국인들이 신기했다. 내 앞 줄 할매는 아예 도시락과 와인 병을 싸와서 씹고 뜯고 마시며 흥겨워했다. 옆 관객의 숨소리마저 거슬려하는 한국 극장 문화와 비교하면 자유 그 자체였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 아이는 비 오는 런던의 겨울 거리에서 'That's not right!!"하면서 허리에 두 손을 척 얹고 고개를 틀었다. 주연 아역 배우와 싱크로율 300%! 모처럼 찬란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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